"당신 아버지는 60년 전 제 은인입니다"

카터 블레이즈델(Blaisdell·75)씨의 눈이 무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곽해오(71)씨를 향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곽씨를 안고 무대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을 얼싸안고 있는 두 사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관객석에서 큰 박수가 쏟아졌다.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아 1000여명을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송해 목숨을 구한 미군 대령이 있었다. 카터 블레이즈델씨는 그 대령의 아들이고, 곽씨는 당시 1000명의 고아 중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이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3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만났다.

1950년 9세이던 곽씨는 서울 남대문시장 근처 친척집에서 가족들과 피난 준비를 하다 갑작스러운 폭격을 만났다. 폭격을 피해 헤매다 길을 잃은 곽씨는 다시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했다. 며칠째 음식도 먹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다 미군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들어갔다.

미 공군 군목(軍牧)이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은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1950년 12월 중공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고아들을 전국 각지로 보냈지만 1000여명은 더 이상 보낼 곳이 없었다. 상부와 협의 끝에 인천에서 배에 태워 제주도로 이송하기로 했지만, 고아들을 인천으로 옮기고 보니 배는 1000명의 승객과 물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상태였다.

김포로 돌아온 블레이즈델 대령은 극적으로 미 공군 C54 수송기를 동원해 그해 12월 20일 고아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출발했다. '한국 전쟁고아 1000명의 아버지' 블레이즈델 대령 이야기는 당시 미국 신문과 잡지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1964년 전역한 뒤 2001년 한국을 찾아 그가 구출한 고아들을 다시 만났고, 2007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블레이즈델씨는 행사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아버지의 조그마한 노력을 이렇게 기억해주는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블레이즈델씨는 전쟁 당시 13세 소년이었다. 그는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영웅이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지 못했다"며 "20대가 돼서야 아버지로부터 직접 그 당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곽씨는 "(블레이즈델씨가) 아버지와 판박이여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며 "그때 미군들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가족을 잃고 일주일째 제대로 먹지 못했던 어린 소년이 살아남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블레이즈델씨는 "우리 아버지가 생명을 구한 곽씨는 나와 한 형제나 다름없다. 정말 행복하고 기분이 좋다"고 말하고 곽씨를 다시 얼싸안았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차흥봉 회장은 "한국의 현대 사회복지 역사는 6·25전쟁 당시 외국 원조단체들이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을 만들고 그들을 돕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했다"며 "한국 사회복지 실천 60주년을 맞아 한국 고아 1000명을 구한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의 공로와 사회복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