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추억 속으로 사라질 '만리동(2013년 재개발)'… 다큐로 담는다

"마탈레 동산은 1950년대 갑갑한 판잣집에 살던 피난민들이 숨을 돌리기 위해 찾았죠. 지금도 한여름철이면 동네 노인들이 땀을 식히기 위해 모여요."

11일 오후 서울 중구 만리동 마탈레 동산. 만리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다는 정화순(79) 할아버지는 시나리오작가영상제작단 손학열(42) 감독의 카메라를 앞에 두고 추억을 풀어냈다. 손 감독은 은행나무와 대추나무 그늘 아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 7명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동산으로 이어진 60도 경사의 가파른 골목길 계단과 오밀조밀 모인 2~3층 다가구 주택들도 고스란히 담았다. 손 감독은 동네 너머 서울역, 남산 풍경도 빼놓지 않았다. 손 감독은 1년 후 재개발로 사라지는 서울 도심 달동네 만리동 구석구석을 기록으로 남기는 중이다. 영상은 70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수십년 이상 만리동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건의로 추진됐다. 만리동 주민자치위원장 이영달(55)씨는 "남들이 보기엔 달동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추억이 담긴 터전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만리동 만리2구역은 2007년 10월 주택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지난 7월 4일 재개발 계획안이 통과됐다. 이 일대 6만7271㎡가 2013년 말까지 철거되고 2016년엔 지하 5층, 지상 25층 1207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선다.

주민들 사이에 100년 이상 됐다고 알려진 '박우물'도 사라지고 기록으로만 남는다. 박우물은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 당시 우물은 근처 10여 가구가 서로 돌아가며 관리했다고 한다. 3대째 만리동에 살았다는 한 주민은 "40년 전만 해도 1000여 가구가 박우물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다"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기한 우물이었다"라고 말했다.

최영환(75)씨는 젊은 시절 퇴근길에 목을 축이던 만리재 시장길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했다. 1980년대만 해도 국밥집, 삼계탕집, 막걸리집들이 100여곳 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10여곳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시장길 선술집에서 직장인들은 퇴근길에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곤 했다.

만리동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공마당'도 다큐멘터리 영상에만 남게 된다. 엉성한 콘크리트 계단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야 도달하는 공마당은 주민들의 꿈과 회한이 서린 곳이다. 이영달씨는 "스물다섯 살 무렵 경주에서 홀로 상경해 만리동에서 살기 시작했다"며 "공마당에 올라 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보면서 성공을 다짐했다"고 했다.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상경했던 그는 어느새 흰머리가 수북한 중년이 됐다.

다큐멘터리는 여름부터 겨울, 봄 동안 만리동 마을 전경과 골목길 등을 꼼꼼히 기록해 70분 분량 DVD로 제작된다. 사진작가 2명도 만리동의 이곳저곳을 앵글에 담는 작업을 같이한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완성된 다큐멘터리는 공중파나 케이블TV 등을 통해 방송할 예정"이라며 "사라진 만리동을 기록한 달동네 사진 전시회도 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