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 [주목, 이 사람] "마을 전체가 거대한 풍경화 됐네!"

  • 글·사진=서지혜 리포터

    입력 : 2012.09.17 22:34

    양주시에 벽화거리 조성하는 이복규 화백
    외지고 삭막했던 마을이소들이 초원서 풀뜯어먹고감나무엔 까치가 날아앉는아름다운 전원마을 바뀌어"사람들이 즐거워할수록제 붓은 신들린 듯 춤춰요"

    이 화백이 자신이 그린 호수벽화 앞에서 낚시하는 사람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7월, 한낮의 폭염 속에 이복규(53·양주시 백석읍) 화백은 콘크리트 벽에 쉴 새 없이 붓질을 하고 있었다. 이 길은 근처 마을 아이들이 학교를 오고 갈 때면 어김없이 걸어야 하는 외지고 삭막한 곳이었다.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고, 시에서도 벽화 제작을 고려했지만, 1억 이상을 호가하는 벽화 제작가격에 진척이 되지 않았다. 지난 7월 양주 출신 화가 이복규씨가 벽화 봉사를 한 후, 아이들은 푸른 목장을 보며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10년 전 텃밭 개간하며 '석화' 시작

    "벽화는 88 올림픽이 열리기 전, 벽화 개념이 없던 때부터 그렸어요. 캔버스 그림만 그리다 보니 큰 벽에다 원 없이 그려보고 싶어 시작하게 되었지요."

    올해 양주시는 아름다운 벽화거리 두 곳이 갑자기 생겨났다. 세간의 관심을 끈 이곳은 광적면 새낭골 마을과 은현면 전원마을 입구로, 이복규 화백이 올해 봄, 여름에 그린 것이다. 처음 작업은 그의 솜씨를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부탁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양주시에서 새낭골 소식을 접한 후 재료비를 지원하면서 요청한 것이었다. 양주시 광적면이 고향인 그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개인 화실을 열고, 전국을 돌며 공공 기념관, 개인 주택 등에 벽화 그림을 그리다 10년 전 귀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면 어김없이 상을 받았고, 주위의 아낌없는 칭찬에 자연스레 화가가 꿈이 되었다.

    "저는 거의 독학이에요. 무슨 미대 나온 것도 아니고 어려서 어느 선생님이 잘 그린다고 하면 가서 곁눈질로 보고 와서 저만의 그림 세계를 만든 겁니다. 예능이라는 게 전문 코스를 밟아 큰 사람도 있지만 도인에게 수련 받듯이 숨은 재주꾼도 따로 있는 거죠. 저는 이를테면, 야인인 겁니다."

    틀에 갇히지 않은 까닭에 그의 예술 세계는 수채화, 유화, 인물화, 풍경화, 추상화, 목공예, 석화, 벽화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복규 화백이 새낭골 마을의 집 담벼락에 그린 풍경화. 마을 주민들은 벽화가 생기고 난 후 이웃 간의 대화가 늘고, 마을 분위기가 몰라보게 밝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10년 전, 고향에 내려와 집 앞 텃밭을 개간하던 중 돌그림, '석화'가 시작되었다. 석화는 까만 돌에 시골의 눈 오는 밤이, 돌의 굴곡에 따라 바다의 파도가 출렁이고 동굴 밖의 일출광경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화단을 만들려고 밭에서 돌을 주워다 놨는데, 똑같은 돌이 하나도 없고 (생김새가) 재밌더라고요. 마침 아내가 '창의적이고 새로운 걸 하나 만들지' 하는데, 그 순간 뭔가 스쳐가는 게 있었어요. 즉시 돌의 느낌에 맞춰서 그림을 그려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돌의 느낌을 살리면서 그리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 그리게 됐죠."

    그가 '석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 것은 돌과의 교감이다. 돌이 자기 몸에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할 때야 비로소 붓을 든다는 것이다. 대답을 듣기까지 8개월을 기다린 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연을 간직한 석화 작품들은 그가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간장게장 전문식당 '숲 속 화가 이야기'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그림들

    석화와 달리 벽화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든 이야기를 걸어오고, 완성된 그림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큰 매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새낭골에서 벽화를 그릴 때는 집주인들의 요청에 따라 감나무에 까치가 날아 앉는 그림, 크리스마스에 산타가 오는 그림, 한가로운 바닷가 등의 그림을 각각 그려주었다. 최근에 그린 은현면 축산 공장 벽화는 그곳 축산 낙농인들의 염원을 담아 튼튼한 소들이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광경을 그려 넣었다. 실제보다 더 실감나고 화려한 그의 그림들도 알고 보면 페인트의 단조로운 6가지 색에서 모두 나온다. '약을 제조하듯이' 50~60가지 색을 직접 만들고, 비가 와도 흘러내리지 않게 그만의 노하우를 발휘한다.

    은현면 공장 벽(약 4mX300m)에 그려진 목장 그림. 폭염 속에 가게와 벽화 현장을 바쁘게 오가며 그렸다.
    "어차피 그림 그리는 걸로 왔으면 이것저것 다 흡수해서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온 동네 잡동사니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뭔가가 나오더라는 거, 그걸 겪지 않으면 다방면의 뭔가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한쪽만 가면 꼭 막혀요."

    고향 양주의 높은 산과 기름진 들녘, 길가의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도 머릿속에 항상 스케치해 둔다는 이복규 화백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수록 나의 붓은 신들린 듯 춤을 춘다"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