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 '박쥐' 우주기지… 한국인의 스케치에서 나왔다

"우주기지를 짓는 5년 동안 딱 세 번 웃었다. 현상공모에 당선됐을 때, 현장에서 첫 삽을 떴을 때, 그리고 다 짓고 떠날 때. 다른 땐 도무지 웃을 겨를이 없었다. 가끔 스스로 돌아봐도 '이걸 어떻게 했었나' 싶다(웃음)."

지난 4월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 한복판에 세계 최초의 민간 우주기지 '스페이스포트 아메리카(Spaceport America)'가 들어섰다. 영국의 '괴짜 억만장자' 브랜슨 버진 그룹 회장이 세운 우주기지다. 당시 국내외에서 화제가 됐었지만 막상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설계·지휘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건축가 백준범(40)이다. 그는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1999년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얻고 주로 영국에서 활동해 국내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장 누벨, 렌조 피아노 같은 건축 거장 밑에서 일하다가, 노먼 포스터가 세운 건축회사 '포스터'에서 12년을 근무했다. '스페이스포트'는 그가 포스터사(社)에서 일할 때 진행한 것이다.

백준범은 지난 7월부터 서울 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백준범은 "나는 건축가로선 아직 시작하는 단계"라고 했다. "건축은 어차피 설계자 자신의 고집으로 하는 게 아닌, 주변 상황과 건축주의 요구 사이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과정이에요. 결국 저에게 건축이란 주어진 한계상황에서 많은 사람과 대화 끝에 풀어낸 수학문제 같은 거죠."

 

2007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스페이스포트 아메리카'도 건축주인 영국의 우주여행사업회사 '버진 갤럭틱(Virgin Galactic)', 미국 뉴멕시코주 당국과 대화를 거듭하며 완성했다고 한다. 백준범은 "건축주와 뉴멕시코주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물인 것처럼 주변 환경에 잘 녹아들 것, 그러면서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상징적인(iconic) 모습일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백준범이 이 요구에 답으로 내놓은 결과물이 정면에서 보면 산등성이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땐 큼직한 날개를 펼친 박쥐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형체의 건물이다. 외벽을 흙빛에 가까운 색으로 여러 번 칠하고, 터미널 빌딩과 격납고, 우주왕복선이 뜨고 내리는 3.2㎞의 활주로도 유기적인 곡선으로 디자인해 주변 사막 경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백준범은 "스페이스포트는 친환경적이기도 하다"고 했다. "건물 내부에 공기 순환로의 일종인 '어스 튜브(earth tube)'를 만들어, 외부 공기가 그 튜브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차가워지도록 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인데도 에어컨 없이도 늘 실내 온도가 17도를 유지되는 비결이죠."

 

올해 말엔 그가 디자인한 파나마의 '파나마 시티 공항'이 공사에 들어간다. 실내를 나무로 마감하고, 청사 안에 '실내 정원'을 끌어들인 친환경적 디자인이라고 한다.

백준범은 최근 국내에서 첫 작품으로 독일 자동차 회사 BMW의 주문을 받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VIP 고객을 위한 '모빌리티 라운지'를 만들었다. 회사 측은 "자동차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듯이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라운지를 설계해 달라"고 했단다. 이에 따라 합판 목재와 우레탄을 합성해 벽면과 천장, 바닥 등을 만들어 원하는 곳에서 바로 조립하고 해체할 수 있도록 했다. 벽면을 마치 보석을 다양한 각으로 깎아낸 것처럼 보이도록 울퉁불퉁한 오각형으로 디자인한 것도 눈에 띈다.

백준범은 "앞으로도 일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즐거운 건축·디자인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싶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