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29] 속절없이 흘러버린 도시의 세월 속… 푸른 꿈 스러져도 그대만은 내 곁에

가난한 청춘은 도시로 모여든다. 1986년 이른 봄,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 젊은 남녀 둘이 타고 있다. 청년(리밍·黎明)의 이름은 리샤오쥔(黎小軍), 처녀(장만위·張曼玉)의 이름은 리차오(李翹)다. 그들은 서로를 모른다. 홍콩 영화 '첨밀밀(甛蜜蜜)'의 시작이다.

둘에게는 꿈이 있다. 돈을 벌어 고향의 약혼녀를 데려오는 것이 샤오쥔의 바람이라면, 말 그대로 '잘살게' 되는 것이 차오의 희망이다. 그 부푼 꿈을 허름한 짐 가방 속에 보물처럼 숨겨 넣고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한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커다란 도시,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한복판이다. 촌스러운 행색과 어리벙벙한 눈빛을 숨길 수 없지만, 야무지게 입술을 꼭 깨물고서 그들은 거대한 도시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홀로 시작한 타지 생활이 녹록할 리 없다. 남자가 간신히 구한 직업은 배달일이고, 여자는 맥도널드 매장의 파트 타이머로 일한다. 둘이 처음 알게 되는 장소도 맥도널드다. 광둥어도, 영어도 하지 못해 아무것도 주문할 수 없는 샤오쥔을 차오가 도와주는 게 첫 인연이다. 세상천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유일한 동향(同鄕) 친구라는 사실은 두 사람이 급속도로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계기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둘은 그로부터 10년에 걸쳐 헤어졌다 만났다, 감정을 확인했다 떠나보냈다 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둘의 관계는 '필연적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되곤 하지만, 샤오쥔과 차오를 결속시키는 힘은 어쩌면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단단한 동지애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 가치 말이다. 한때는 푸른 꿈을 좇아 고향을 떠나온 뜨거운 청춘이었으나,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열정은 사정없이 구겨져 버렸다. 그들의 삶은 구비마다 서로를 향한 열정으로 뒤흔들리고, 그건 점점 멀어져만 가는 순수하던 과거를 향한 향수와 구별되지 않는다.

1995년 뉴욕, 둘이 우연히 재회하는 장소가 가수 덩리쥔(鄧麗君)의 죽음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앞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자기들과는 너무도 다른 화려한 곳에 존재한다고 믿고 동경해온 스타는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중년이 된 남녀는 고향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왔다. 어쨌거나 꿋꿋하게 살아남아 1990년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장년이 되었을, 1980년대적(的) 청춘 남녀 샤오쥔과 차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