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오케스트라에서 튜바 연주하는 김석견(55) 한화저축은행 상무

2010년 4월, 저는 난생처음 무대에 올랐습니다. 1000석 규모인 경기도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 성남윈드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였죠. 튜바 주자인 저는 맨 뒷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혹시나 틀릴까 봐 악보에 계이름을 빼곡히 적어놨었어요. 엉뚱한 음(音)을 불까 봐 소리도 자신있게 못 냈죠. 얼마나 떨리던지 객석이 그저 까맣게 보였습니다.

제 본업은 금융업입니다. 외국계 은행에서 시작해 외환 업무, 여신 심사 등을 30년 동안 해왔습니다. 아침 7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면 전날의 국제정세와 경제지표를 훑어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회의와 고객 면담 등 바쁜 일정이 이어지지요. 상담은 주로 대출을 문의하는 분들이 많아 딱딱하고 사무적이기 쉬운데, 음악 얘기로 접근하면 고객 마음을 열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제 인생에 음악이 들어온 '3대 사건(?)'을 소개할게요. 중학교 때 수업 종소리가 모차르트 곡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소리가 제 안에 들어왔습니다. 고등학교 땐 밴드부 모집 소식을 듣고 문 앞을 서성이다가 "안 들어오고 뭐하냐"고 선생님이 채근하시는 바람에 엉겁결에 들어갔죠. 거기서 악기라는 걸 태어나 처음 만져봤어요. 그때 잡은 악기가 수자폰입니다. 튜바의 한 종류인데 밴드에서 사용하는 '행진용 튜바'이지요.

튜바라는 악기, 생소한 분들 많으실 겁니다. 나팔 계열 중 가장 큰 금관악기로 음역(音域)도 가장 낮습니다. 왜 하필 튜바를 골랐느냐고요? 음악성도 없고 악보 볼 줄도 몰랐으니 멜로디를 담당하는 악기는 자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대학 가고 유학 가느라 고교 졸업 이후엔 밴드부 시절을 잊고 살았죠.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이 미국 유학 시절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뉴저지주 집 근처 공원에서 쉬고 있는데 큰 트럭 하나가 오더니 온갖 악기들을 내려놓는 겁니다. 아마추어 악단이 공원에서 연습하는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렇게 여유 있게 살 수도 있구나, 언젠가 나도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한국에 돌아와 취직한 이후론 온갖 스포츠를 섭렵했습니다. 농구, 마라톤, 인라인스케이트, MTB, 수상스키, 승마….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무리하게 운동을 하니 조금씩 몸을 다치게 되더군요. 남을 이기기 위해 운동하는 것에도 점점 지쳐갔어요. 그러다 5년 전 대형사고가 났습니다.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고 45도 경사를 올라가다 오토바이가 뒤집어진 겁니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지요.

멍하니 병실 창가에 서 있다 보니 문득 음악이 생각났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다른 사람들과 하모니를 이루면 즐겁지 않을까. 찾아보니 마침 제가 사는 성남시 분당에 아마추어 관악오케스트라가 있더군요. 2004년 창립된 성남윈드오케스트라였습니다. 2009년 겨울, 그곳 문을 두드렸습니다. 처음엔 그냥 연습하는 걸 구경만 해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단원들이 모두 환영해주면서 앞에 나와 인사를 하라고 성화였어요. "고등학교 때 잠깐 튜바를 했다"고 소개하니 "마침 튜바 주자가 없는데 잘됐다"고 박수를 쳐줬어요. 제 악단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거금 600만원을 들여서 중고악기도 하나 샀습니다.

음대생 선생님한테 레슨을 받으면서 서서히 튜바의 세계에 빠졌습니다.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잔무나 고객과 약속이 없는 날이면 부리나케 집으로 향합니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악기를 싸들고 아파트관리사무소 지하 전기실 옆 후미진 공간으로 가지요. 좁고 방음(防音)도 제대로 안 되는 곳이지만 저만의 연습실입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단원들이 모여 연습을 합니다. 단원 50명 중 3분의 1은 프로연주자이고, 나머지는 저처럼 다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60대까지 연령도 다양합니다. 단국대 음대 김경환 교수의 지휘로 합주 연습을 하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각자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제 소리의 위치를 찾고, 모난 소리는 다듬고 모자란 것은 채우지요. 단원 각자의 레고 조각을 꿰맞추어 새로운 모양을 창조하고 그 위에 색깔을 입히면 비로소 음악이 완성되는 거지요. 수십대의 관악기가 뿜어내는 소리가 연습실 가득 울릴 때마다 제 가슴도 쿵쿵 뜁니다.

튜바는 오케스트라에서 낮은 음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죠. 솔직히 플루트가 일어서서 현란한 솔로를 연주할 때는 부럽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화려하지 않아도 묵묵히 제 소리를 내는 튜바를 사랑합니다. 붕붕 하는 저음(低音)이 안 깔리면 음악이 가벼워지거든요. 타악기가 없을 때는 저음악기가 리듬악기 역할도 합니다.

우리 오케스트라는 매년 4월, 11월 정기연주회를 엽니다. 지난 4월 공연에선 85%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어요. 병원과 종교시설, 군부대 위문공연도 자주 합니다. 특히 봄에는 성남에 있는 국군수도병원 로비에서 꼭 연주회를 엽니다. 이번 가을 연주회 때는 성남에 있는 특수학교 학생들을 초청할 계획입니다. 우리의 예술이 청중과 울림을 같이할 때 그들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내줍니다. 함께 소리를 빚어서 나누고 공감하는 것, 제가 음악으로 또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