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꼬깃꼬깃 장롱 속 추억, 박물관에서 역사 된다

자개장, 모시 적삼, 서울올림픽 모자, 영화 관람권, 전화카드, 주택복권 교환권…. 서울역사박물관이 근현대 생활 자료와 도시 서울 성장 관련 자료, 이른바 '생활 유산' 수집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받은 물품 목록이다. 역사박물관 측은 시민 손때가 묻은 추억의 생활 도구와 서울이라는 도시가 커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모습들을 담은 물건이면 모두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고 지난해 말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모았다. 올 9월까지 220여명에게 2991점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임정순(79)씨는 50여년 전 혼례 때 입었던 모시 적삼과 한복, 큰아들 돌 때 입혔던 색동저고리와 두루마기 등을 가져왔다. 역사박물관 측은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는지 50여년 된 옷이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며 "우리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라고 했다.

1988년 올림픽 당시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황종수(67)씨는 올림픽 현장에서 쓰고 뛰어다녔던 '24회 서울올림픽'이란 글자를 새긴 모자를 기증했다. 강북구에서 '만물 수집가'로 통하는 김규식(53)씨는 우리나라 최초 전화카드와 1978년 국세청이 발행한 주택복권 교환권을 내놓았다. 서초구 주민 최지섭(69)씨가 들고 온 1956년 발행 서울특별시민증에는 이름과 사진, 주소 외에 본적, 가구주 성명, 직업, 가입 정당과 사회단체 정보가 적혀 있다. 당시 6·25전쟁 직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서울에 많았는데, 원주민과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됐다고 한다.

종로구 장사동 출신으로 서울 토박이인 김용욱(68)씨는 할아버지 역과(譯科·통역관) 합격증, 부모 속내의,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과 예물 시계, 버스 노선도와 승차권 등 29점을 기증했다. 전두복(61)씨는 정부 공보부 출신이었던 부친이 남긴 1950~60년대 사진 850점을 건넸다. 숭례문, 명월관, 한강 풍경부터 전씨 형제가 담장 아래서 찍은 가족사진까지 다양하다. 전씨는 "자식들에겐 별 의미도 없고, 보관하기도 곤란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마침 이런 자료를 찾는다기에 갖다 줬다"고 말했다. 역사박물관 김지연 학예사는 "UN 연합군 상륙 당시 모습 등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서울 명소 옛 모습을 담고 있어 가치가 있다"며 "가족사진도 당시 아이들 복식(服飾)사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했다.

최근 사라진 서대문구 서대문아트홀(옛 화양극장)과 강남역 ABC뉴욕제과에서도 폐기 처분할 물품들을 역사박물관으로 운반했다. 1974년부터 강남역에서 영업했던 뉴욕제과는 지난 5월 31일 문을 닫으면서 뉴욕제과 상징처럼 서 있던 160㎝ 높이 산타클로스 동상과 빵틀, 영업시간 안내판, 조리 도구, 조리장이 입던 옷 등 139점을 기증했다. 서대문아트홀에 있던 건물구조안전점검필증, 필름휠, 입장권, 좌석 배치도, 상영 프로그램 안내판 등 117점은 이번에 박물관 생활 유산으로 변신하게 됐다. 서대문아트홀 김은주 대표는 "이것도 다 서울의 역사인데 박물관에서나마 다시 살아남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역사박물관은 88올림픽 당시 IOC 위원장을 태웠던 24인승짜리 의전용 미니버스,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가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자개장과 타자기, 고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 리본, 명동다방 메뉴판, 중국요리집(진성각) 배달용 철가방, 지게꾼 지게 등을 찾아 생활 유산으로 보관 중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안진용 학예연구사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온 기록이 되고 후손들에게 흥미로운 유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증을 원하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02)724-0274~6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