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 "54세에 시작한 공직… 보람으로 가득 채워야죠"

"역시 공무원은 사회에 기여한다는 소명의식이 없으면 힘들 것 같네요. 지난 한달 동안 단단히 각오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결심을 다지게 됐습니다. 제가 좋아해서 도전하고 선택한 만큼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경기 평택시 팽성읍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이재흥(54)씨.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숱이 많이 빠진 전형적인 중년의 이 남자는 그러나 읍사무소 말석에 앉은 새내기 공무원이다. 이씨는 지난 7월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해 지난달 3일 발령을 받고 공직에 입문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채 2개월이 안됐다.

개발팀에 소속돼 재난, 불법광고물 정비, 환경정비 등 현장을 두루 챙기는 일선의 업무를 맡고 있다. 특히 최근 집중호우에다 '볼라벤', '덴빈', '산바' 등 태풍이 잇따라 덮치는 바람에 10일 남짓 비상대기로 밤샘 근무도 하며 녹록지 않은 통과의례도 겪었다.

이씨의 공무원 도전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서울에서 죽 살았다. 20년 남짓 LG, 동양, 현대그룹을 거치며 샐러리맨으로 근무하다 2002년 부장으로 퇴직했다. 그 뒤로도 병원이나 학원 사업에 참여해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09년 중학교 시절 1년을 필리핀에서 유학한 외동딸(18)이 고교 입학을 앞두고 돌아오고, 마침 당장 하던 일도 없어서 처가가 있는 평택에 자리를 잡았다.

"딸과 약속을 했지요. '너는 수능시험을 잘 봐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진짜 공무원이 됐네요."

이씨는 2010년 6월부터 본격적인 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학원을 다니기 어려워 아예 집안에 들어앉아 독학을 시작했다. 배가 부르면 게으름을 피울 것 같아 매일 두끼만 먹고, 새벽에 일어나 책상머리에 앉았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공무원 시험은 워낙 경쟁이 치열했고 국어·영어·국사·행정학·행정법 등 과목도 낯설었다. 쉰 넘은 나이에 오랜 세월 멀리했던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부터가 고역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2010년과 2011년 연거푸 낙방했다. 첫해 7급 시험에 도전해 낙방하자 전략을 바꿨다. 이때만 하더라도 딸은 눈총을 줬고, 아내도 '나이도 있으니 주택관리사 같은 자격시험이 낫지 않으냐'며 거들었다.

그러나 이씨는 오히려 자극을 받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과목별로 수험서를 7~8권 구입해 권당 3~4번씩 읽고 암기했다. 머리에 잘 들어가지 않으면 내용을 벽지에 붙여 두고 수시로 외우는 등 하루 12시간씩 공부했다. 덕분에 올해는 평균 90점에 이르는 우수한 성적으로 무난히 합격했고, 자식·조카뻘 나이 차이가 나는 50여명과 동기로 공직에 입문할 수 있었다. 딸도 평택의 고교에서 전교 1~2등을 할 정도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당연히 읍장이나 담당 팀장 모두 그보다 젊은 30~40대다. 그러나 '나이 어린 선배들'이 자세하게 업무를 알려줘 어렵지 않게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선배들도 잘 챙겨주고, 나도 위계질서를 지키려 노력한다"며 "선배들을 잘 만난 덕분에 쉽게 풀려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는 정년이 불과 6년 앞에 있다. 그는 "진급 등의 문제는 초월한 것 아니냐"며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과거 민간기업에서 일할 때보다는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장 근무가 많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개선하는 일이 많아 보람을 느낍니다." 이씨는 "민간기업이라면 퇴직할 나이에 계속 근무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며 "비록 늦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덤으로 봉급도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