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번엔 조각보전이다… '89세 소녀'의 무한도전

바늘로 실을 끌어올리며 울적한 마음을 꼭꼭 찌르기라도 하듯 손을 놀리다 보면 어느덧 마음이 편안해졌다.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한 땀 한 땀 실을 잡아 올리며 눈물도 찔끔 흘리고 콧물도 훌쩍이면 속상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졌다. 89세 이기옥 할머니가 추억하는 새댁 시절의 추억이다.

67세에 방송인으로, 70대에 화가로 입문한 뒤, 88세에는 '나는 내 나이가 좋다'(푸르메)는 제목의 산문집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이기옥<사진> 할머니〈조선일보 2011년 9월3일자〉가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됐다.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꼭 수채화와 보자기 전을 한번 열어보고 싶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라고 했던 소망을 실현하게 됐다.

'추억을 담은 조각보' 전(10월 20일까지 서울 동숭동 샘터 갤러리)의 주인공이 이기옥 할머니다. 30년간 손바느질해 만든 조각보 중 61점을 선보인다. 대표작인 '꽃밭'은 100년 된 천으로 지은 조각보다. "92년에 세상 떠난 어떤 분이 열아홉 살에 시집 올 때 해온 옷이라며 나를 주데요. 그 붉은 천을 중심으로 주위 색들이 서로 다투지 않게 배색해서 지었지요." 회색빛 은은한 '한산모시'는 남편이 생전에 입었던 적삼과 자신의 치마저고리를 가지고 지은 작품이다. "전부 손바느질했지요. 재봉틀로 박아 매끄러운 게 나는 싫어요. 투박하고 어눌해도 오래된 옷감들과 이야기하며 한 땀 한 땀 꿰매는 재미가 크지요." 조각보의 안감은 본견(실크)으로 넣어 화학섬유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천연 조각보가 됐다.

이기옥 할머니는 "바늘과 천은 여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동무였다"고 회고한다. "솜씨가 그리 출중하진 못했어요. 여동생 둘은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해내는데 맏딸인 나는 내 멋대로 해서 참하지 않다는 소릴 줄곧 들었지요. 이번 조각보를 보셨다면, '또 네 마음대로 했구나' 하실 거예요(웃음)."

바늘과의 인연은 남편(한국 알레르기학계의 명의 강석영 박사)을 따라 독일에 가 살 때에도 이어졌다. "유럽의 정통 십자수에 매료되어 혼자 있는 시간을 수놓는 일로 소일거리 삼았지요. 프랑스 자수의 테이블 크로스, 쿠션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바늘을 놀리다 보니 작품이 수두룩하게 쌓였답니다."

바늘 편력은 퀼트로 이어졌다. 조각보를 뭇기 시작한 것도 퀼트 덕분이다. "퀼트를 하다 보니 문득 예전 어머니의 장롱에서 보았던 생고사 조각보가 눈에 아른거려요. 어머니의 연분홍 하늘하늘한 치마저고리를 싸두었던 조각보였죠. 여름에 육간 대청마루에서 찐 옥수수를 덮었던, 그 위로 아직 뜨거운 김이 보자기 사이로 솔솔 올라오던, 할머니가 직접 무으신 모시 조각도 그리워지고요."

조각보를 한 지 30년. 어느덧 돋보기의 도수는 높아지고 거친 손은 비단실과 싸우기 일쑤지만 그래도 바늘과 실, 사연이 담긴 옷감은 이기옥 할머니의 굳건한 동무다. '…나는 오늘도 숙고사에 물을 들여 조각보를 뭇는다. …고마워 친구야. 너희들이 벗해주어서 나는 외롭지 않았고, 바늘을 움직이며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거든.'('나는 내 나이가 좋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