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26 09:22

MY MOVIE

시칠리아 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 토토. 그는 평생 영화를 자양분으로 성장해간다. 현실은 <시네마천국>이 될 수 없지만 우리는 때때로 토토와 같이 스크린 앞에서 울고 웃는다. 한 편의 영화로 지친 일상을 치유하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의 풍요를 더하기도 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계 명사들이 추억 속에 간직한 인생 최고의 영화를 꼽았다.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풍월당 대표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9)

도리스 되리 감독의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인생을 뒤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자신의 일에만 성실했던 독일의 평범한 부부. 어느 날 아내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는 남편 루디(엘마 웨퍼)에게 불치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남편을 졸라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정작 여행 도중 먼저 세상을 뜨는 이는 아내 트루디다. 트루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홀로 남게 된 루디는 생전 아내가 원하던 일본으로 떠난다. 그녀가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삶을 대신 살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기계적인 일상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우는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잊었던 가치를 다시 깨닫게 된다. 특히 웅장한 후지산의 풍경을 앞에 두고 아내를 그리며 어설프게 부토(butoh)를 추는 남편 루디의 모습을 담은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베를린과 도쿄를 잇는 아름다운 영상이 영화의 장점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장면

일본에 도착한 루디는 코트 속에 아내의 옷을 입고 벚꽃이 만발한 공원을 거닌다. 그러다 코트 자락을 훤히 펼쳐 보인다. 비록 아내는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옷이라도 그토록 와보고 싶어 하던 일본과 벚꽃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이 미팅에 가려고 한껏 멋을 부린 채 거리에 나서는 순간 장발단속 경관이 그들을 쫓아온다. 도망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뒤로 송창식의 ‘왜 불러’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매우 유명하다.

장발 단속을 비롯해 미팅, 휴강, 입대 등 당시 대학생의 풍속도를 내 젊은 날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내가 이 작품을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유다. 훗날 영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다시 <바보들의 행진>을 보게 됐고, 이후 나는 언제나 이 영화를 잊지 못할 영화로 마음속에 두고 있다. 아울러 영화학자로서, 평론가로서 영화이론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바보들의 행진>이 영화 형식과 스타일 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영화의 내러티브와 스타일, 이데올로기의 함수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초석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장면

영화의 모든 장면. 수많은 장면이 하나의 미장센처럼 언제나 내 삶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경애 SM C&C 사장

영화 <로마의 휴일>(1953)

미국에서 보낸 중학생 시절, 나의 취미는 집에서 비디오 플레이어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휴일>도 그때 처음 봤다. 아버지는 오드리 헵번을 참 좋아하셨다. 헵번이 등장하는 영화를 즐겨 보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도 옆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화면 속 헵번의 아름답고 청순한 이미지는 동경의 대상이 됐고, 지금까지 나는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헵번을 꼽는다.

헵번이 나온 영화 가운데 최고는 단연 <로마의 휴일>. 남녀 간의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헵번의 해맑은 얼굴, 사랑스러운 미소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의 휴일>을 세기의 명작으로 기억되도록 만든 것 같다.

인상적인 장면

흑백영화 속 로마를 보면 지금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로마는 그만큼 아름다워 보인다. 헵번의 짧은 머리와 귀여운 옷차림이 현장의 생동감을 더하는 것 같다. 마치 그녀와 함께 로마 곳곳을 여행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스페인광장에서 앤(오드리 헵번)과 조(그레고리 펙)가 손을 잡고 걷는 장면. 그리고 조가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 앤에게 장난을 치는 장면이다. 그곳 명소들은 지금까지도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스페인광장 주변 가로수의 생김새까지 거의 똑같다. 앤 공주의 기자회견을 마친 후 조가 혼자 밖으로 걸어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박주만 이베이코리아 대표이사

영화 <파이터>(2010)

지난해 해외출장에서 이베이(eBay) 존 도나호 회장의 추천을 받아 보게 된 영화다. 복싱에 재능을 보이는 주인공 미키(마크 월버그)는 자신을 키워주겠다는 복싱프로모터의 제안을 뿌리친다. 대신 왕년에 잘나가는 복서였지만 현재는 마약중독자로 전락한 형 딕(크리스찬 베일)을 트레이너로 삼는다. 그리고 끝내 승리를 쟁취한다.

<파이터>는 스포츠영화이자 가족영화다. 그러나 전형적 문법과는 다르게 그려졌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미키를 중심으로 통제광인 엄마,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마약중독자 형, 의존적이기만 한 누나들…. 보통의 가족영화에서 가족 개개인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는 주인공의 든든한 보좌역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족은 성공을 방해하고 간섭하며 때로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 가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주인공의 갈등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링에서 주인공은 형의 충고대로 결정적 순간에 상대방을 정확히 공략한다. 주인공에게 KO승이 선언되는 순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여러 방해 요인 속에서도 목표를 향한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적절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떤 스포츠든 혹은 어떤 경영 상황이든 유효한 전략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영화다.

인상적인 장면

기억할 만한 대사가 있다. “머리, 몸통, 머리, 몸통!” 매니저를 자처하며 자신을 옭아매던 가족들과 결별해 새로운 매니저와 함께 승승장구하던 미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교도소에 수감된 형 딕을 찾아가 상대방 공략법을 물었을 때 형의 대사다. 몸에 힘을 빼고 머리와 몸통을 교대로 공략하라는 것. 미키는 결국 이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고, 유망한 트레이닝팀을 떠나 다시 가족에게 돌아간다.

이 대사는 마약중독자 형이 트레이너로서 자신의 가치를 동생에게 증명하는 한편, 이기적인 가족들을 동생의 온전한 성공을 위해 한데 모으는 마법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정곡을 찌르는 형의 전략과 그것에 대한 동생의 고지식한 믿음. 그것이 단순히 한 복서의 탄생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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