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26 09:22

PEOPLE

지난해 101번째 영화를 선보인 데 이어 최근에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감독에 선임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102번째 영화도 구상 중이라고 했다. 바로 희수(喜壽)의 영화감독 임권택 얘기다.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용인 자택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임 감독을 만나 식지 않는 열정의 비결을 물었다.

수식은 필요치 않다. 그 이름 앞에는 ‘거장(巨匠)’이란 두 글자면 충분하다. 지난해 임권택 감독이 101번째 작품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적이 놀랐다. 100번째를 넘어 이제 101번째라니. 그런 그는 현재 102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최근엔 주로 자택에서 “쉬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지만 아내의 우스갯소리대로, 그는 늘 그렇듯 “몸은 집 안에 머물지만 마음은 벌써 바깥에 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깥’엔 온전히 영화만이 존재한다.

과거를 넘어 거듭나기

여든이 가까운 지금껏 쉼 없이 활동을 이어온 임권택 감독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1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임 감독은 누차 답해왔다. 100이나 101 같은 숫자엔 아무런 관심이 없노라고. “지금껏 내가 몇 편의 영화를 찍었는지 헤아려본 일이 없어요. 뭔가를 기록할 만큼 대단한 것을 일궈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00여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내가 감독으로서 크게 달라진 것도 없고, 뭔가 다른 인상을 보여준 적도 없지요. 나는 사실 그런 숫자들을 드러내지 않고 훌쩍 지나감으로써 부담감을 덜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또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세간의 주목에 응한 방식은 참으로 그다운 것이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내가 해온 기왕의 영화들에서 거듭나려고 더욱 노력했지요. 그 점이 아직도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지의 제작과정과 우수성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담아낸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 같은 실험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시도한 <달빛길어올리기>의 작법은 평단과 관객을 모두 놀라게 했다. “그간 내가 해온 영화는 모두 극성(劇性)이 강했어요. 픽션이었던 거죠. 그런 허구로부터 벗어나 다큐라는 새로운 형식을 차용했습니다.” 허구적 극성을 배제하고 일상을 무미하게 그려냄으로써 영상 자체의 힘을 살려내고 싶었다는 것.

그의 의도대로 화면 가득 달빛이 넘쳐흐르는 풍부한 영상은 장르적 깊이를 더했다는 호평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실제로 도전해보니 극성을 배제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일각에서는 영화가 더 깊어진 것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지만 재미가 없다는 관객도 많았고… 무리하게 극성을 배제하려 했기에 장르적 재미가 덜하지 않았나, 시간을 가지고 더 연구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02번째 영화에서는 <달빛 길어올리기>에서의 부족한 지점을 더 채워 넣을 계획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온 ‘멍청이’

임 감독은 1962년 <씨받이>로 데뷔한 이래 지난 50여 년간 줄곧 영화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외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스스로도 “나는 처음부터 평생을 영화만 찍기로 결심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놀라운 고백은 지금부터다. “사람들은 내가 많은 작품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으레 꽤 괜찮은 작품을 뚝딱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매 순간이 턱걸이였어요.” 결코 타협이란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늘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 최선의 극단을 선택했다.

그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화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 못한 멍청이였어요. 영화에만 매달려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다양한 것을 누리지 못했다고, 잃고 살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근자에는 그런 생각이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임을 알았어요. 평생 가장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그것과 함께 산 것이 보통 행복한 일이 아닌데, 이 자체로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임 감독은 자신이 만든 100여 편의 영화 가운데 초창기 절반의 작품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불이라도 나서 몽땅 타버렸으면….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TV에서 우연히 60년대식 ‘저질영화’를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됐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것이 자신의 영화인지 몰랐다는 임 감독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그런 것조차도 고맙게 느껴지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저급한 영화도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영혼을 걸고 찍었는지….”

그렇지만 여기에 거창한 상찬이 덧붙는 것 역시 그는 원치 않는다. 임 감독은 그저 자신의 나이만큼 살아냈고, 살아낸 그 세월 만큼 영화로 찍어낸 것뿐이라고 말한다. “딱 그 수준. 나는 천재도, 뭣도 아니니 내 영화는 내가 아는 딱 그만큼.”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정의인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아라!

그렇다면 임 감독을 여기까지 끌고 온 열정의 비결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임 감독은 예의 그답지 않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조심스레 입을 연다.

“글쎄, 이렇게 이야기하면 설명이 될까. 내 영화 중에 조선 말기의 화가 장승업을 영화화한 <취화선>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장승업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는 턱없이 부족했지. 굳이 화가의 삶을 영화화하고자 했다면 정선이나 김홍도, 신윤복 같은 걸출한 이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나는 어쩐지 장승업에 끌렸어요. 내 감성에 친숙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지요. 그 삶의 행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무 살에 이미 천재 소리를 들었고 쉰둘에 행방불명이 됐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금강산 어디 들어가 살았다고 해요. 말 그대로 화선(畵仙)의 경지에 이른 것이지. 어쩌다 한번 천재 소리를 듣기는 쉬워도 그것을 쉰이 넘을 때까지,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진 말년까지 계속 들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 그건 그만큼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다는 증거라고 봐요. 나는 알 수 있지요. 그만한 천재는 아니지만, 나 역시 참 열심히, 쉼 없이 살았으니까….”

아울러 임 감독은 평생 남들이 하는 일을 무작정 좇아 한 적도, 기왕에 해놓은 작은 성과에 머무르려 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노라고 강조한다. “실패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까 두려워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나 역시 많은 실패를 했고… 그냥 저질러보는 거예요. 여기서 안 되면 끝이지, 하는 생각으로.”

이런 그는 영화거장이기 이전에 이미 한 사람의 스승이라 해야 옳다. 그에게 멘토로서의 조언을 부탁하자 명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진정으로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것. 그것이 바로 열정의 진원지가 되어줄 것이라고. “좋아하는 일을 쉽게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시간을 갖고 찾아보세요.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미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불행이지요. 정말 즐거워서 자신을 온전히 다 쏟을 수 있는, 미쳐서 할 수 있는 일을 만나야 해요. 그리고 그것에 평생을 열중하세요.”

40~50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50대에 은퇴를 경험한다 해도 아직 시간은 많다는 것. 바야흐로 100세 시대가 아닌가. 기왕의 하던 일을 이어 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바보스러운 생각에 머무르기보다는 은퇴 이후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앞으로 30~40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까.” 누차 힘주어 말하는 그다.

끊임없는 도전, 102번째 영화 구상 중

이제 임 감독은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감독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되는 것. 영화를 통해 줄곧 우리 민초들의 수난과 질곡을 이야기해온 그에게 이 세계적인, 그러나 지극히 한국적인 무대는 색다른 실험의 장이 될 것이다.

“그간의 이 같은 대회가 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 대회는 진정으로 각국의 순수한 화합의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문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소통의 장 말이지요. 우리나라 역시 분명 자랑거리가 있고, 그 문화적·전통적 개성을 잘 녹여내어 행사를 꾸며볼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모두가 고대하는 102번째 영화는? 단지 “때가 되면…”이라는 정도로 말을 아끼는 임 감독. 하지만 그의 얼굴엔 새록새록 소년의 설레는 빛이 어린다. 그렇다. 거장은 멈추지 않는다. 다만 더욱 뜨거워질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