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개내언니를 그리며

나의 친정 백모(伯母)에겐 세 며느리가 있었다. 안뜰언니는 장손(長孫) 며느리답게 숭굴숭굴하면서도 너그러웠고, 개내언니는 일을 조리 있게 푸는 지혜로움을 지녔으며, 동래언니는 자분자분하면서 자태가 고왔다. 조모(祖母)와 백모로 이어지는 대가족의 가풍(家風)을 단단히 묶은 건 사대(四代) 봉제사와 수시로 드나드는 손님들 그리고 시시때때로 길흉사(吉凶事)가 있어 일손이 부족해서였다. 그들 고부(姑婦)는 자기 대문 안에 든 친·인척과 길손, 심지어 각설이패까지 결코 배를 굶기지 않는 걸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잔칫날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큰집 디딜방아에선 떡쌀 찧는 쿵덕거림, 안방 부엌의 떡시루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건넌방 부엌에선 동구 밖에서 잡아 온 소를 고는 가마솥의 트림 소리, 안채 뜰에는 임시 아궁이에 소두방(소댕)을 거꾸로 눕혀 전을 굽는 집안 아지매들의 웃음소리, 평상 위에는 도미와 조기·산적거리를 칼질하는 안뜰언니와 가정부들의 도마 소리가 담을 넘어가곤 했다.

밤이면 촛불 아래서 안뜰언니랑 개내언니가 화톳불을 피우고 목단 항아리에 든 조청을 꺼내 손에 그 뭉치를 들고는 서로 다투듯 밀었다 밀렸다 하는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졌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돗자리를 깔고 무명 홑청을 그 위에 씌워놓고, 찹쌀떡을 손바닥만 하게 얇게 편 걸 사이 뜨게 놓아두고 뜨거운 바닥에 바싹 말렸는데, 유과를 만드는 건 개내언니의 몫이었다. 개내언니는 길흉사를 앞두면 눈대중으로 떡쌀은 얼마나 들고 요리는 어떤 걸 해야 하나를 저울추 달듯 훤히 꿰었다. 개명(開明)한 집안에서 자란 개내언니가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동경 유학이나 서울 유학을 못 한 건 손끝이 매워서였는데, 정작 그 덕을 본 건 친정인 정씨 집안이 아니라 우리 성가 집안이었다.

개내언니의 요리 솜씨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건 문어조(文魚條)였다. "문공(文公)을 오릴 땐 가위보다는 칼이 더 섬세한 무늬를 낳는 기라. 칼도 손아귀에 쥘 정도로 작아야 하고 낫처럼 속 날이 휘어져야만 오리기에 안성맞춤인께." 문어를 '공(公)'으로 예우하는 개내언니의 손 마디마디 사이에는 구름을 헤친 해가 동산 위에 떠오르고, 학이 소나무에 깃을 치고, 물과 돌 사이를 엉금엉금 기는 거북이, 불로초 사이에서 사슴이 뛰놀았다. 그걸 본 집안 아지매들도 탄복했다. 오매 십장생(十長生)이네.

6·25전쟁이 일어난 그해 여름 인민군이 경남 진주의 우리 동네까지 쳐들어왔다. 남자들은 피란을 가고 여인들은 인민군의 시중을 들었다. 인민군 중 제일 높은 사람이 '정 동무'였다. 정 동무는 끼니 때마다 큰집 안채로 들어와서 음식을 점검했고, 성씨댁 음식이 맛깔스럽다고 여인들을 격려했다. 윽박지르는 것보다 달래는 게 효과가 있다는 걸 넘겨짚은 선심 공세였다.

인민군이 쳐들어온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그 일행이 대곡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훈련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집 머슴 덕쇠가 우리 모녀를 보호하려고 인민군의 총을 훔치다가 발각된 사건이 일어났다. 정 동무는 덕쇠를 큰집 사랑채 동쪽에 있는 향나무에 새끼줄로 묶고는 총살하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개내언니가 정 동무 앞으로 가서는 엎드렸다. "이걸 드릴 테니 덕쇠를 살려 주이소." 증조부가 사용했던 서당 회초리는 우리 집안의 가보(家寶)였다. 괴목에 옻칠한 그 회초리는 자색이 아른아른한 데다 손잡이 마구리에는 놋쇠로 테를 둘렀는데 닳고 닳아 순금처럼 빛을 품었다. 겉면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가 아로새겨졌고, 끝 마구리를 막지 않은 건 드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면 마구리에선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서 꽃을 피우기 마련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반동분자를 처단하는 게 나의 임무라니까. 얼른 처치해." 정 동무의 명령이 쩌렁 울렸다. "안 됩니더. 장작도 패고 땔감도 져다 날라야 하는데 일손이 달리니 살려 두었다 정 무엇하면 나중에 그러시소." 그런 사이 큰집 닭장에서 닭들이 홰를 치며 울었다. "대낮인데도 얄망궂게스리. 아재요, 덕쇠가 기똥차게 닭 모가지를 잘 비트니 풀어 주시고예. 제가 닭도리탕을 멋들어지게 요리해 올리겠나이더."

개내언니의 호소로 덕쇠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늦은 점심때라 절대 위기의 순간에 정 동무의 마음을 움직인 건 '아재'라고 부르는 정다움과 식욕(食慾)의 부추김이었다. 그 이튿날 아군의 반격으로 그들이 물러갈 때 정 동무는 서당 회초리를 조모 품에 다시 안겨주었다.

개내언니는 바느질도 잘해 가세(家勢)가 기울어졌을 땐 부산으로 가서 한복점을 차려 오남매를 잘 키웠다. 나의 결혼식 땐 이바지를 훌륭히 차려주어 시댁 어른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게 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 간 우리 가족이 손님을 맞이할 때마다 개내언니는 시장 봐 오는 것에서 설거지까지 책임지고 도와주었다.

그 언니가 임종을 맞았을 때 나는 손을 잡고 울먹였다. 정녕 저세상으로 떠나려면 그 양손을 내게 잘라주고 가라니까. 나이가 들수록 웬 그리도 치러야 할 잔치와 손님 접대가 많은지. 나는 갈수록 요리 못하는 게 내내 짐이 되어 가슴까지 무거워진다. 그러면 그럴수록 개내언니의 정겨운 손길이 마냥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