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9.27 00:24

교수·CEO 20여명 서울대 '기회균형 전형' 학생들 돕는 모임
"궁핍했던 학창시절 생각나" 학생 한명한명 멘토 돼주고 기업 후원 받아 생활비 지원도

"아이들아, 잔혹한 세상도 너희를 꺾진 못한단다. 너희가 빛을 발할 때까지 우리가 옆에 있어주마."

지난 19일 오후 서울대 공대 인근 교내 식당인 두레미담. 배철현(50·종교학과) 교수 등 교수 9명이 기회 균형 전형 학생들을 돕자고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서브라임(Sublime·숭고한)'의 첫 회의가 시작됐다.

기회 균형 전형은 '개천' 속 학생 중 수재(秀才)를 뽑자는 취지로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됐다. 저소득층 가정 아이들 중 180명을 정원 외로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선발한다. 학업 성적과 사고 능력,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뽑지만 이렇게 뽑힌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기에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부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들어왔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고 학업 성적이 뒤처지는 학생도 나왔다.

지난 5월 21일 오전 9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기숙사에서 기회 균형 전형으로 입학한 공대 1학년생 A(19)씨가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주변 학생들은 "성실했던 친구"라고 기억했지만 A씨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을 복용 중이었고, 그 사실을 아는 학생조차 없었다.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진 교수들이 하나둘 모였고 '기회 균형 전형 학생들을 지키자'는 취지에 동참하는 기업인들도 찾았다.

지난 1989년 8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연 매출 수천억원 IT 회사의 주인이 된 케이디파워 박기주 대표도 그래서 동참했다. 박 대표는 "늘 궁핍했던 내 학생 시절이 생각났다"면서 "빈약한 현실에서도 서울대까지 들어온 학생이니 이 나라의 충분한 기둥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함께했다"고 했다. 유명 애니메이션 캐릭터 '뽀로로'를 만든 회사로 유명한 오콘의 김일호 대표도 "유일하게 우리 사회를 공평하게 할 수 있는 게 교육의 기회"라면서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인 것 같다"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SAP 코리아 형원준 대표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창의적 능력을 발휘한 학생들을 위해 재정적으로 크게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못하지만 지원을 호소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들을 비롯해 지금까지 동성화학 오영택 대표, IK 윤석규 대표, 에코시안 은종환 대표 등 기업가와 교수·명예교수까지 모두 20여명의 사회 지도층 인사가 모였고, 프로젝트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기회균형선발로 들어온 학생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서브라임’소속 교수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교수들은“어려운 환경이지만 꿋꿋이 버티라”고 조언했다. 왼쪽부터 배철현 교수, 이대보·박준영 학생, 이희원 교수.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서브라임'은 기업 대표·교수를 기회 균형 전형 학생들의 멘토로 연결해주고, 기업의 후원을 받아 생활비도 지급할 예정이다. 내년 입학할 예정인 기회 균형 전형 1학년생 180명 전원과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해당 전형 학생들이 대상이다. 서울대도 도움을 바라는 학생들만 관리하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기회 균형 전형 전(全) 학생을 관리하기로 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소수자 배려 정책(affirmative action·AA)을 실시해 선발된 학생에게 장학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대준다"면서 "이번 프로젝트는 장학금만을 대주던 기존 기회 균형 전형을 보완해 학생들에게 AA에 근접한 배려를 해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책으로 세상을 간접 체험한 아이들과 달리 이 학생들은 이미 세상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한 아이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열심히 배워 남에게 진정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4년째 기회 균형 전형 입학사정관으로 학생들을 지켜본 배철현 교수의 말이다.

학생들도 대환영이다. 2010년 기회 균형 전형으로 뽑힌 종교학과 3학년 이대보(21)씨는 "외지에서 혼자 서울로 와 아는 선배도 선생님도 거의 없어 서울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제일 힘들었다"면서 "이제 든든한 선배, 선생님이 생길 것 같아 무엇보다 힘이 된다"고 말했다.

"교수님, 상담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바쁘셔서 찾아뵙기 어려웠어요."(이대보 학생)

"바쁜 척하는 거지, 안 바빠. 언제든 우리가 옆에 있다는 걸 꼭 알아줬으면 한다."(배철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