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감귤, 그 위엔 바닐라, 끝은 계피… 나만의 향을 쌓는다

아침저녁으로 코끝이 알싸하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도 제법 서늘해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명순씨는 "매년 요맘때 향초를 꺼낸다"고 했다. "바닐라 또는 재스민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는 향초는 초가을 바람에 쌀쌀해진 집을 포근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커튼이나 쿠션 커버를 바꾼 것만큼이나 집안 전체의 느낌이 확 달라져요. 이른바 '향기 데코'인 거죠."

한때는 향수란 그저 몸에만 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에서 시작된 이른바 '센트 서라운딩(Scent Surrounding·향으로 주변 공간 분위기를 바꿔놓는 것)' 열풍은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깊숙이 침투했다. 향기 전문 브랜드는 물론이고, 일반 화장품·명품 패션 브랜드에서도 앞다투어 향초와 디퓨저(diffuser·액체 향기를 공기 중으로 서서히 퍼뜨리는 장치)·룸 스프레이 같은 제품을 내놓는 추세다.

최근엔 향기를 '실내 인테리어'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한 가지 향만 고집하기보단 이것저것 다양한 제품을 섞어 '나만의 향'을 창조하는 경우도 흔해졌다. 이른바 '향기 레이어링(Layering)'이란다. 공기 중에 향기를 겹겹이 겹쳐놓아, 다른 곳에선 흔히 느낄 수 없는 독특하고 고유한 공간 분위기를 만드는 기법이다. 조 말론·딥티크·록씨땅·프레시 같은 향기 전문 브랜드 매니저들과 인테리어 디자이너 전문가에게 '향기 레이어링'을 잘하는 방법을 물었다.

◇가장 쉬운 방법, 향초 2~3가지를 섞어 켜라

조말론 런던 리테일 매니저 권태일 부장은 "향기 레이어링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2~3가지 서로 다른 향기를 뿜어내는 향초를 한꺼번에 켜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 핵심은 향기의 무게를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거실을 중심으로 향기 데코를 하고 싶다면, 거실엔 보통 향초보다 큼직한 대용량 향초를 태우고, 욕실과 거실에 작은 크기의 향초를 하나씩 더 켠다. 바람이 통하는 길에 향초를 놔두면 더욱 효과적. 서로 다른 향기가 피어오르면서 바람결에 섞여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향초의 크기는 넓은 공간에 둘수록 큼직한 게 좋고, 주방·침실처럼 아늑한 공간엔 작은 것이 더 알맞다. 권 부장은 "향기를 섞을 땐 감귤처럼 시큼하고 달콤한 시트러스 향을 먼저 피워올리고, 그 위에 바닐라·과즙·나무 향기처럼 감미로운 향을, 마지막엔 계피처럼 코끝을 톡 쏘는 듯한 스파이시 향을 얹는 순서로 켜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 있는 집, 향초 대신 디퓨저와 룸 스프레이

아이가 있는 집에선 향초가 아무래도 위험하다. 이럴 땐 디퓨저, 룸 스프레이, 룸 퍼퓸 등을 섞어서 향기를 내는 것을 권한다. 이명순 디자이너는 "액체 향기를 나무를 통해 공기 중으로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디퓨저는 향초를 태우는 것과 거의 동일한 효과를 낸다"고 했다.

디퓨저로 전체 밑그림이 될 만한 향기를 정했다면, 그다음엔 군데군데 향기가 다른 룸 스프레이를 뿌려 포인트를 주는 것도 괜찮다. 보다 은은한 향기 레이어링을 선호한다면, 베개에만 뿌리는 '필로우 스프레이', 서랍·침구류·베갯보·타올·속옷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집안 묵은 향기를 제거하는 '사셰(sachet·향주머니란 뜻)' 등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쓰임새에 따라 다른 향기를

록씨땅 김지민 차장은 "향기에도 적당한 쓰임새가 따로 있다"고 했다. 공부하는 학생을 위해선 나른한 기운을 떨쳐낼 수 있는 상큼한 감귤향을, 중요한 미팅을 할 땐 공간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나무 숲 계열의 향기를, 데이트를 할 때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꽃향기나 과즙 향기로 분위기를 만드는 식이라는 것. 딥티크 현경선 과장은 "담배 냄새를 제거하고 싶을 땐 천연 동물성 향료의 일종인 사향(麝香·musk) 계열 냄새를 활용하는 게 좋고, 집에 밴 음식 냄새를 날리고 싶을 땐 허브의 일종인 버베나(vervena) 잎 냄새를 활용한 향초를 쓰면 효과적"이라고 했다.

◇향초를 오래 쓰려면

향초가 빨리 닳을까 봐 처음부터 잠깐만 켜고 금방 끄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향초를 오래 쓰려면 처음엔 최소한 2시간을 켜놔야 한다고 한다. 프레시 임태경 주임은 "향초의 밀랍이 물처럼 다 녹을 때까지 처음에 켜놔야 향초를 더 오래오래 쓸 수 있다"고 했다. 심지는 촛불을 끈 이후에 바로 세워두는 게 좋고, 다시 초를 켤 땐 까맣게 타버린 심지의 끝 부분만 조금씩 잘라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