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다와 모히토 한 잔, 진한 재즈에 취하다

플로리다만이 불타오르기 시작할 때 소년들은 물에 뛰어든다. 카리브해 특유의 찌를 듯 따가운 햇살에 하루종일 달궈진 몸을 해 질 녘에 식히려는 것이다. 이들은 자맥질을 세차게 하다가 갯바위를 기어오른 뒤 다시 바다에 뛰어들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사위(四圍)가 어둑해질 때쯤 소년들은 말레콘(방파제)으로 기어나와 여자친구를 찾고 갯바위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초로의 사내 한 명만 앉아 있다. 등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꿈쩍도 안 하고 바다만 바라본다. 바다와 하늘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깜깜해질 때가 돼서야 가슴에 십자가 성호를 그은 뒤 말레콘으로 걸어나온다.

초로의 사내는 앉아있는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딱히 기쁘거나 슬퍼지지도 않고, 과거의 일이 떠올라도 금세 생각에서 지워진다. 해가 뜨고 지지 않는다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가장 가벼운 상태에서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어디서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말레콘에 앉아있다 보면 절로 모히토 한 잔과 음악이 절실해진다. 해 질 무렵 말레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력 있는 연주자를 만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말레콘뿐만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시장에서도 영화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나올 법한 나이 지긋한 사람 몇몇이 모여 음악을 연주한다. 관광객이 많은 곳에선 이 영화의 주제곡이나 다름없는 '찬찬(Chan Chan)'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온다.

제대로 된 음악을 듣기 위해 상업 지구인 베다도(Vedado)에 있는 '재즈클럽 여우와 까마귀'(Jazz Club La Zorra y El Cuervo)부터 갔다. 조지 벤슨과 추초 발데스가 공연을 한 적이 있는 아바나 최고의 재즈 클럽이다. 아바나의 이정표인 '호텔 내셔널 쿠바' 바로 앞에 있고, 입구를 빨간색 공중전화 박스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눈에 잘 띈다. 10CUC만 내면 칵테일이나 럼 등 술 두 잔과 공연(오후 11시~오전 2시)을 즐길 수 있다. 좁고 허름한 내부에 동네 청년처럼 생긴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라 순간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연주로는 절대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좀 더 열정적인 무대를 원한다면 일요일 정오를 기다려야 한다. 베다도 근처 '아멜 거리'(Callejon de Hamel)에서 쿠바 음악 거리 공연이 있다. 악사와 가수에다, 댄서들까지 등장하는데 주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해서 금방 빠져든다. 거리 공연이라 입장료는 따로 없지만 공연을 즐겼다면 상자를 들고 다니는 아이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게 도리다.

◇아바나 곳곳에 숨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존 레넌

아바나 여행을 인솔자 없이 혼자 떠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 따르면 이곳은 남미 도시 중에서도 아주 안전한 편이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아시아인이 신기해 쫓아오며 말을 거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악의를 표시하거나 해칠 의도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바나 시내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관광도 어렵지 않다. 여행 첫날 5CUC를 내고 2층짜리 여행 버스 한번 타면 대강의 지리와 가고 싶은 곳을 파악할 수 있다. 주요 호텔과 관광지에 15분 간격으로 버스가 서고, 한번 내린 뒤에도 버스표만 갖고 있으면 그날 하루종일 언제든 다시 탈 수 있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성당과 건물이 고스란히 남겨진 비에하(Vieja) 지역부터 돌아보면 편하다. 헤밍웨이가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초고를 쓰며 묵었던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 호텔도 이곳에 있다.

시내 관광을 마친 뒤에 베다도의 주택가에 있는 '레넌 파크'에 찾아갔다. 공원의 한 벤치에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청동상이 놓여 있을 뿐이다. 1960년대엔 비틀스의 음악이 반동적이란 이유로 쿠바에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넌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게 쿠바 음악 팬들에게 알려지면서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까지 레넌을 '혁명'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망 20주기인 2000년 이 공원과 그의 청동상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공원에 간 것은 레넌 때문이 아니다. 딱히 볼 게 있는 공원도 아니고 시내 중심지와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레넌의 안경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방문객들이 레넌의 청동상에 씌워진 동그란 안경을 계속 가져가자 결국 정부에선 사람을 고용해 이 안경을 지키기로 한 것. 레넌의 청동상에 다가가자 근처 벤치에 있던 할아버지가 다가와 레넌에게 안경을 씌워줬다. 사진을 찍고 자리를 뜨자 그는 안경을 벗긴 뒤 상의 왼쪽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직업란에 뭐라고 쓸까. '레넌의 안경을 지키는 자'라고 쓴다면 꽤나 멋질 것 같다.

여행 수첩

한국에선 직항로가 없으므로 쿠바 주변국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어캐나다)나 프랑스 파리(에어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아바나 직항편이 있다. 미국은 거리는 가깝지만 직항로가 없어 멕시코를 경유해야 한다.

1CUC(외국인 전용화폐)는 우리 돈 약 1200원. 미국 달러엔 환전 수수료가 10％ 이상 붙으니 캐나다 달러를 갖고 가서 환전하는 게 낫다. 관광객들이 가는 도심에서 벗어나면 CUC 대신 CUP(현지인들이 쓰는 화폐)를 받기 때문에 만일을 위해 CUP를 비상용으로 갖추는 여행객들도 있다. 그러나 CUP는 다른 단위로 환전이 안 되고, 쓸 일도 많지 않으니 아주 약간만 환전해야 한다.

정부에서 인증해준 민박집 ‘카사(Casa)’는 1박에 10~15CUC. 현지인들이 운영하니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고, 인심도 좋다. 국영인 ‘호텔 내셔널 쿠바’는 1박에 100CUC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