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리더십] "시장 갈 땐 양복 대신 점퍼… 고객 처가喪 꼭 챙기라 지시"

이순우(62) 우리은행장이 인터뷰를 겸해 점심을 함께하자고 초대한 곳은 서울 광장시장의 한 노점 식당이었다.

이 행장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주인아주머니를 보고 "우리 누님 하기로 했다"고 농을 걸자, "에이, 행장님이 오빠 하기로 했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모음 전과 조기구이, 비빔밥으로 한 상 차려졌다. "어, 막걸리도 줘야지." 시장 통로 가운데 있는 식당에서 1시간 30분 동안 인터뷰를 하는데 상인 몇몇이 다가와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이 행장은 "경제가 어려운지 어떤지 시장에 나와 봐야 안다. 행장실하고 화장실만 오가면 은행장 못 한다"고 했다.

은행원들은 행장이 될 확률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이라고 한다. 직원이 1만5000명 정도인 우리은행은 매년 200명 정도 대졸 사원을 뽑는다. 은행장은 서너 기수에 1명 정도 나오니 경쟁률이 600대 1이 넘는 셈이다. 더구나 우리은행은 1999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한 뒤 2008년까지 10년간 계속 관료 출신 등 외부에서 행장이 영입됐다. 이런 이유로 우리은행 관계자는 "우리은행 행장은 삼성전자 회장보다 더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영업으로 두각을 나타내서 행장까지 됐다는 말을 듣는다.

"영업은 고객을 만나는 것이다. 마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제대로 만나야 한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겉치레인지, 진심인지 알아본다. 어떤 옷을 입는지도 중요하다. 중소기업 사장님들을 만날 때는 작업복 점퍼를 입는다. 이런 성의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도 작업복 점퍼 차림으로 나왔다. 왼쪽 가슴 부분엔 '우리은행 행장 이순우'라고 새겨져 있었다.

"작년 3월에 행장이 된 뒤 이 옷을 새로 맞췄다. 시장에 어울리는 건 양복이 아니라 점퍼 아니겠나. 중소기업을 방문할 때는 봉고차 9인승을 타고 간다. 공장 마당에는 봉고차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올해는 연말까지 총 150개의 업체를 직접 방문할 계획이다."

◇을지로 지점에서 만난 인생의 멘토, "마음을 열어라"

―은행장이 되기까지 가장 결정적 순간은?

"상업은행에 입행한 1977년 첫 근무지인 을지로 지점에서 인생의 멘토(스승)를 만났다. 대리였던 양택기(67) 선배다. 사법시험을 때려치우고 은행원이 됐는데, 직장이 성에 안 차서 대충 일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는데 어느 날 선배인 양 대리가 '퇴근하고 소주 한잔 하자'고 부르더라.

그런데 이 양반이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대뜸 종이를 돌돌 말아서 머리를 때리더라. '너 그렇게 할 거면 그만둬라. 판·검사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삼성그룹에 가고 싶으면 가라'라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냈다.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데 '너 계속 다닐 거면 이렇게 해봐라. 그러면 5년 내에 좋은 은행원이 될 거다'라면서 세 가지를 얘기해줬다.

'마음을 열어라.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 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첫째, 욕을 좀 해라. 둘째, 말을 많이 해라. 셋째, 많이 웃어라'고 하더라. 욕을 하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친밀감을 주기 위해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라는 의미였다. 그날 밤 한참을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울었다.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는 욕도 어색하고, 아무 데나 끼어서 말참견하고 웃고 하는 게 힘들었거든.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여자 행원들이 '이 주임님 저녁에 밥 좀 사주세요' 하면서 연애 상담, 인생 상담을 하길래 바로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업무 성과도 올라가서 '대부계 이 주임'으로 이름을 날렸다. 양 선배님은 1998년에 지점장으로 퇴직하셨는데 지금도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날 밤 술자리가 없었다면 내 이름 뒤에 행장이라는 직함이 붙지 못했을 것 같다."

―한 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기억할 정도로 인맥 관리가 철저하다는데.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다 기억할 순 없다. 지금은 명함을 받으면 컴퓨터로 관리하지만, 20년쯤 전에는 그날그날 만난 사람들의 인적 사항과 대화 내용을 공책에 적었다.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사진도 붙였다. 그런 대학노트가 5권쯤 있다."

◇고객의 처갓집 상(喪)을 챙기는 것이 영업의 비결

―고객의 처가상(喪)은 반드시 챙기라고 지시한다는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처가상에 반드시 가야 한다. 은행 사람들이 상가를 찾아가면 그 집 사위가 처가에서 대우를 받지 않겠느냐. 이건 말이 필요 없는 생활의 지혜다. 한참 일선에서 영업을 뛸 때는 하룻밤에 상가 여섯 군데를 돈 적도 있다. 행장이 된 뒤에 가봐야 할 상가가 두 군데인 날이 있었다. 그런데 두 곳 모두 우리 임원들이 안 보였다. 상주는 '다녀갔다'고 했다. 다음날 임원회의에서 '일찍 집에 가서 연속극 봤느냐. 상가는 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험한 말을 좀 했다. 힘이 들어도 발품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은행원이다."

―은행 내에 "행장님은 스테이플러로 찍은 보고서는 안 보신다"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서 속도감 있게 일하자는 것이다. 스테이플러를 찍지 말라는 건, 어떤 보고서든 A4용지 1장에 다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제일 핵심이 되는 것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명확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패가 두려워서, 멈춰서거나 움츠러들면 안 된다"

―인생에서 잘한 결정 세가지를 말해달라.

"별로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결정이 없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열심히 은행원으로 산 것이 전부다. 누가 나한테 행장을 목표로 살아왔느냐고 묻더라. 어떤 보험회사 사장은 책상머리에 '사장이 된다'고 써 붙이고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정상을 바라보면서 등산을 하면 질려서 절대로 못 올라간다.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 자리를 보면서 걸어가야 정상을 정복한다. 단, 내딛는 발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서 걸어야 한다. 어떤 한순간의 결정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인생 살면서 잘한 일은.

"잘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엔 실패의 연속이었다. 명문 중학교 시험에 실패하고 집 근처 중학교를 갔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검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중학교 입시부터 떨어졌으니 실망이 대단하셨다. 고교 입시에서도 할아버지 소원을 못 풀어드렸다. 지방 명문고에서 떨어져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대학 입시 때도 서울대 법대를 쳐서 두 번 떨어지고 성균관대 법대로 갔다. 대학에서 2학년 때부터 사시 준비를 했는데 계속 떨어져 4학년 2학기를 남겨놓고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갔다. 복학해서 다시 시험 준비를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은행에 입사했다. 은행 입사 후에도 국제부 등 당시 선호하던 부서엔 못 가고 지점에서 대부 담당을 했다."

―은행장이 된 데 최고의 자산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어려서 실패를 많이 했더니, 어느새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나는 실패가 두려워서 멈춰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실패가 내가 가진 최대 자산이었던 셈이다."

☞이순우 행장은…

1950년 경북 경주 출신이다. 대구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상업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고, 1999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해 출범한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의 첫 인사부장을 지냈다. 2004년 우리은행 부행장(경영지원본부장)이 됐고, 2008년 수석 부행장이 된 뒤 작년 3월 행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