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30] 총 쏴 正義를 실현했어도… 도시의 밤은 아직 위태롭다

꼼짝 않고 멈춘 채로 세상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사람, 어디로든 가지만 출발하기 1분 전까지도 자신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 택시 드라이버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1976년작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월남전에서 돌아온 사내다. 목숨을 걸고 싸워 살아남았지만 다시 돌아온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가진 거라곤 지독한 불면증뿐, 그는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 그는 택시를 몬다. 비좁은 택시 운전석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비상구가 되는 것이다. 흔들리는 유리창 너머 트래비스의 눈에 비친 뉴욕 뒷골목 구석구석은 어둡고 황량하며 비정한 곳이다.

"모든 짐승은 밤에 활동한다. 언젠가 비가 내려 이 도시의 쓰레기들을 씻어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읊조린다. 불안과 고독 속에서 트래비스는 제 속의 무기력과 분노를 키워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혼돈스러운 그 도시의 오물들을 깨끗이 청소할 거라는 꿈을 꾼다. 그것이 헛된 영웅심리에 사로잡힌 정신병자의 강박(强迫)인지, 은둔하는 진짜 메시아의 전언(傳言)인지 혼란스럽다.

트래비스는 마침내 권총을 든다. 총은 남성성의 권력에 대한 대표적 상징물이다. 그러나 그가 총구를 겨누는 곳은 애초에 노렸던 유력한 정치가의 심장이 아니라 뉴욕 변두리에 기생하는 포주다. 결과적으로 어린 창녀(조디 포스터)를 구해낸 그는 정화운동을 벌이는 미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언론에 의해 추앙받는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악인(惡人) 한 명은 사라졌으나 사회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고, 도시의 밤거리는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린다. 출구 없는 거리에서 트래비스는 방향 모를 운전을 계속할 것이다. 그 남자의 결말이 해피엔드가 될 수 없음을 우리가 더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