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금요 에페 검객(劍客)인 이성재(59) 과천CS 이사장

지난 8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30회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펜싱 선수들이 선전(善戰)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잠시 추억에 빠졌다. 막 스무 살을 넘긴 나는 어느 여름날 체육관에서 펜싱 검(劍)을 휘두르고 있었다. 몸은 벌써 땀범벅이었지만 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큰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스크 속에서 훅훅 거리던 그때의 숨소리, 땀 냄새, 칼 부딪치는 소리 등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펜싱을 빼놓고 내 젊은 시절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대학 시절 취미로 펜싱부에 가입하면서 ‘펜서(fencer)’가 됐다. 스포츠 특기생도 아니면서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약 2년쯤 지나면서부터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다.

전국체전 은메달도 땄고, 국가대표 선발전 최종 엔트리(16명)에도 들어가 봤다. 내 실력이 출중했다는 자랑은 아니다. 그 시절 펜싱 선수층이 워낙 얇았으니까…. 엘리트 선수들의 실력이 국제 수준에 오른 요즘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펜싱을 나는 30년 이상 잊고 지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제약회사에 입사해 여느 샐러리맨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이공계 출신이지만 나는 주로 마케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고, 해당 분야 임원을 마지막으로 25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을 마감했다. 지금의 직장인 과천시시설관리공단(과천CS)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6년이었다. 신문에 난 이사장 공채 공고를 우연히 보고 응시해 임용됐다. 3년 임기를 두 번 마쳤고, 올해 세 번째 임기에 들어갔다.

내가 오래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든 것은 두 번째 임기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대학 후배 몇몇을 중심으로 한때의 ‘청년 검객(劍客)’들이 다시 뭉쳤다. 동호회를 만들어 4년째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펜싱복을 입고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펜싱 검을 들면 다시 20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빠진다. 몸에 적당히 붙는 펜싱복이 중년의 아랫배를 가려주는 것이 맵시도 꽤 난다.

물론 젊은 시절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아예 녹슨 것은 아니었다. 선수로 등록해 전국 대회에도 출전하고 있는데, 지난 2010년 이후 서울시장배(盃) 펜싱선수권대회 에페 단체전에서 3연패(連覇)했다. 현역 등록 선수로는 아마도 내가 최고령이 아닐까 싶다. 내 주종목은 에페다. 휘어지고 가벼운 검을 사용하는 플뢰레는 스텝을 이용한 움직임이 많기 때문에 좀 힘에 부친다. 반면 에페는 순발력과 경험(요령)이 중요하다. 에페는 옛날 기사들이 칼끝에 독(毒)을 묻혀 결투할 때 사용한 검으로 몸의 어디든 찌를 수 있고 옛날 실전(實戰)에선 독을 바른 칼이 한 번 스치기만 하면 승부가 끝나는 단판 승부형 종목이다.

나는 요즘 과천에서 펜싱 꿈나무를 키우는 꿈을 꾸고 있다. 이번 달 우리 체육관에서 펜싱교실을 신설한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과천CS는 실내체육관과 수영장·아이스링크 등 체육시설과 각종 공연시설을 관리하고 있다. 김연아 선수가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곳이 바로 과천실내빙상장이었다. CEO인 내가 펜싱을 좋아해서 펜싱교실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펜서라는 사실을 직원들이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이다. 꽤 오래전부터 체육관을 이용하는 시민 사이에서 펜싱교실을 열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런던올림픽으로 붐도 일었다. 서울 일부 지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사설(私設) 펜싱교실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비록 규모가 작은 클럽 형태로 시작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좋은 선생님에게 배우면 제2의 김연아 선수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 물론 펜싱은 어른들도 취미로 시작하기에 손색이 없는 스포츠다. 기본 스텝이 어렵지만 3개월 정도 열심히 익히면 경기도 할 수 있다. 권투 선수처럼 스텝을 밟는 움직임이 많아 다이어트용 운동으로도 좋다.

가끔 내게 지방 공기업 CEO로 장수(?)하는 비결을 묻는 분들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펜싱의 기사도 정신과 공기업 경영이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런던올림픽에서 신아람 선수가 판정 시비를 겪기는 했지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펜싱은 태생적으로 정직성을 중시하는 스포츠다. 내가 처음 펜싱을 할 때만 해도 전자심판기가 없었다. 연습이나 시합을 할 때면 먼저 찔린 사람이 손을 들어 인정했다. 그것을 우리는 기사도(騎士道)라고 배웠다.

생존을 위해 수익을 내야 하는 민간 기업과 달리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공기업은 그런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민간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을 때도 나는 정직한 것이 결국 이긴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닫곤 했다. 하물며 공기업은 공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이익도 내야 하지 않는가. 내가 공기업 CEO를 운 좋게도 세 번이나 연임할 수 있었던 것은 펜싱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이런 정신을 익혀 왔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