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살려라" 두 男子의 40일 전쟁… 한 男子는 철저하게 외로웠다

"유럽을 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이 수단은 충분할 겁니다."

7월 26일 영국 런던 연설에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던진 두 개의 문장은 악화 일로로 치닫던 유럽 재정 위기 사태를 진화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 이 발언이 나오고 40일 뒤인 9월 6일 드라기는 '재정 위기국 국채 무제한 매입'이란 초강력 대책을 내놓았다. 드라기의 이 발언은 유럽중앙은행과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전쟁을 알리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드라기의 폭탄선언 이후 ECB의 국채 매입 조치가 발표된 40일 동안의 막전 막후를 월스트리트저널, 슈피겔, 로이터 등 외신과 핵심 인물들이 발표한 성명과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했다.

◇7월 26일: 이탈리아인으로부터의 전화

7월 26일, '북해의 별'이라 불리는 독일 북부 휴양 섬 질트.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휴가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재정이 파탄 난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구제해야 할 것인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로존의 맹주인 독일 국민은 남유럽 국가들을 더는 자신의 세금으로 구제하길 원치 않았다. 빅토리아풍의 5성급 호텔에서 북해를 바라보던 쇼이블레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유럽중앙은행의 총재, '수퍼 마리오'라 불리는 이탈리아인 마리오 드라기였다.

쇼이블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연설 참 근사해 보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드라기가 이탈리아인 특유의 리듬감 넘치는 억양으로 말했다. "도와주세요. 장관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드라기는 유럽중앙은행이 스페인·이탈리아 등 재정 위기국의 국채를 매입해 재정을 지원하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쇼이블레는 "분데스방크의 반대가 너무 심해요. 분데스방크를 재무장관이 건드릴 수는 없어요"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드라기가 받아쳤다. "묘책이 있습니다. 장관님은 그저 언론을 통해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을 찬성한다고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쇼이블레는 '하나의 유럽' 신봉자였다. 그는 그 어떤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유로존이 붕괴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믿었다. 쇼이블레는 드라기에게 답했다. "알았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며칠 후엔 미국의 재무장관인 티머시 가이트너가 이 섬을 찾기로 돼 있었다. 쇼이블레는 생각했다. '보나 마나 스페인을 어떻게 좀 해보라고 우리를 압박하겠지….'

드라기는 비서에게 말했다. "자, 이번엔 프랑스 대통령."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을 공개적으로 찬성해온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설득하기는 쉬웠다. "각하, 지금이 '프랑코-게르만'(프랑스-독일)의 공조를 보여줄 적기입니다. 신속한 지지 성명을 낼 수 있도록 메르켈 총리도 좀 설득해주세요." 알프스 산에서 휴가를 보내던 메르켈은 몇 시간 후 올랑드의 전화를 받았다. "나도 드라기에게 기본적으로는 찬성입니다." 양측의 실무진이 성명 문구 작성에 돌입했다.

◇7월 27일: 독일 정부, 분데스방크에 등을 돌리다

예상대로였다. 분데스방크는 드라기의 연설 다음 날인 27일 아침 일찍 비난 성명을 냈다. "국채 매입은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43세에 분데스방크 총재로 발탁된 옌스 바이트만은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하는 동안 프랑크푸르트의 사무실에서 분을 삭이고 있었다. '드라기는 중앙은행을 돈 찍는 공장으로 보는 모양이군.'

바이트만은 1970년대 말 이탈리아 남동부 가르가노 반도를 여행하며 받은 충격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동전 대신 '제토니'라는 일종의 토큰을 사용했다. 공중전화를 전화비의 물가 상승 속도에 맞춰 개조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날 바이트만은 분데스방크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그 여행에서 나는 중앙은행의 제대로 된 역할을 몸에 익혔다. '쉬운 돈'을 갈구하는 정치인들에게 맞서 통화가치를 지킨다는 역할 말이다"라고 말했다.

분데스방크의 성명 발표 3시간 후, 독일 쇼이블레 재무장관이 휴가지에서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유로를 구하기 위한 드라기의 결정을 환영한다." 얼마 후 메르켈과 올랑드가 공동 성명을 냈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 바이트만이 예상치 못했던, 드라기의 프랑코-게르만 포섭 작전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시나리오는 드라기가 원하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8월 1일: 바이트만, 외톨이가 되다

드라기라고 인플레이션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 시절 그는 물가 안정이라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매일 받아보는 30개가 넘는 경제 지표, 특히 연 7%를 넘어버린 스페인의 국채 금리를 보며 그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한 차례 접어야 할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월례 통화정책회의를 하루 앞둔 8월 1일, 유럽중앙은행 정책위원회 만찬. 드라기는 2개월 동안 준비해온 재정 위기국 국채 매입 프로그램의 세부안을 내놓았다. 위원들의 표정을 본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는 깨달았다. 자신의 편은 없었다. 드라기가 수개월 동안 전화를 수백 통 돌리며 위원들을 일일이 설득한 결과였다.

바이트만은 물러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는 드라기에게 말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위원회 내에 주목할 만한 의견 불일치가 있었음을 반드시 발표해 주십시오." 회의가 끝난 후 드라기는 기자회견장에 섰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국채 매입 조치에 대해 논의만 했다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바이트만 총재만 국채 매입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특정 위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깬 도발이었다. 바이트만에겐 '유로존의 통합에 반기를 든 고집 센 독일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는 점점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9월 6일: 세계 최강 중앙은행장의 탄생

한 달 후인 9월 6일. 유럽중앙은행 통화정책회의를 갖기 위해 위원들이 다시 프랑크푸르트의 회의실에 모였다. 드라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연설 이후 약 한 달. 시장은 바이트만의 고립과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바이트만은 1년 전을 떠올렸다. 2011년 6월에도 재정 위기국 국채 매입 문제가 논의됐었다. 바이트만의 입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지분 27%를 가진 분데스방크의 격렬한 반대에 당시 유럽중앙은행 위원들은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와 지금 변한 것은 단 하나였다. 유럽중앙은행 수장이 그리스 구제에 애쓰다 지친 프랑스인 장클로드 트리셰에서, 분데스방크를 빼고서라도 유로존을 구하겠다는 기민한 이탈리아인 드라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투표가 시작됐다. 유럽중앙은행 정책위원회 위원은 23명. 17개 유로존 국가의 중앙은행장과 6명의 집행위원(총재 포함·현재 1석 공석)으로 구성된다. 통화정책회의에서 모든 위원은 동등한 1표를 갖는다. 투표 결과는 21대 1. 바이트만은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드라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면적 통화 거래'라는 거창한 이름의 무제한 국채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트만의 완패였다. 뉴욕타임스는 드라기의 회견 후 "이번 승리로 드라기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장이자 유럽의 가장 힘 있는 지도자에 등극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