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생각하면 눈물 나지만 나도 빚이 있어 이것밖에 못 도와주는구나… '漢詩 절창' 석북 선생, 한글 편지글 첫 공개

"느릿골(동네 이름) 빈터의 푸른 풀을 보니 지나다가 눈물이 나고 네 생각 하니 홍성 깊은 골짜기 밖에 와서 잠깐 고된 살림을 한다니 딱하고 불쌍한 마음이야 내 딸이나 다르랴마는…. 이제야 돈 두 냥, 유청(乳淸) 한 되, 생치(生雉·꿩고기) 한 마리, 녹말 한 되씩 사람 시켜 보내니…."

18세기 한문 시문학의 대가였던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 선생의 한글 편지가 처음 공개됐다. 이 편지는 석북이 61세 때인 1773년 12월, 출가한 조카딸에게 보낸 것. 어려운 형편의 조카딸을 돕고 싶지만 자신도 큰 빚을 지고 있는 처지라 작은 선물만 보낸다는 내용이다.

조선 영조 시대를 대표하는 미문(美文)의 시인인 석북은 관서악부(關西樂府)와 한벽당십이곡(寒碧堂十二曲), 금마별가(金馬別歌), 관산융마(關山戎馬) 등 주옥같은 시편을 남겼다. 그의 한문 서신이 올 초 충청문화연구소에서 책으로 묶여 나온 적은 있지만 한글 편지 글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직계후손 모임인 숭문회 회장 신홍순 전 예술의전당 사장이 석북 탄생 3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문중에서 보관해오던 서신들을 정리하던 중 한글 편지 한 통을 봉투째 발견해 8일 본지에 소개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사대부가 쓴 한글 편지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 등의 것들이 소개된 적이 있지만 대개 부인과 자식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인데, 이 편지는 이례적으로 조카딸을 향한 외종숙부의 애틋한 마음을 잘 담아냈다. 그 무렵 문인들이 한글 문장 구사에서도 빼어난 솜씨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숭문회는 오는 11일 석북 탄생 300주년 기념행사로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 청담아음(淸談雅音)'을 한국의 집에서 연다. 석북의 유명 한시를 시창, 시조 등의 선율에 얹어 부른다. 김영기 중요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가 김효영 중요무형문화재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등 전통음악 연주자들의 협연에 맞춰 노래하고 송지원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 교수, 안대회 교수 등이 해설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