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31] 떠난 자는 전설이 되고 남은 자는 가을을 꿈꾼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계절의 기후 요소에 대해 연구하는 기상학자가 아니라,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학자일 것 같다. 온 세상이 깊은 가을빛으로 흐드러지고 젖은 낙엽이 땅 위를 구를 때 많은 남성이 고독해지고 허무해지는 건 분명하다. 대부분의 남자가 잠시 흔들리다 꾹 참고 제자리를 지키는 데 반해 모든 걸 버리고 휙 길을 떠나버리는 남자도 있다. 여자들에 의해 전자는 '성실한 남자', 후자는 '나쁜 남자'라고 명명된다.

영화 '가을의 전설'은 이렇게 대비되는 두 남자의 인생 역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배경은 1차 세계대전 무렵의 미국 몬태나주이다. 루드로우 대령(앤서니 홉킨스)에게는 아들 셋이 있다. 전사한 막내아들의 약혼녀 수잔나(줄리아 오몬드)를 장남과 차남이 모두 마음에 두고 있다. 수잔나는 책임감 있는 큰아들 알프레드(에이단 퀸)가 아니라 야성적인 매력을 가진 둘째 아들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방랑벽이 있는 트리스탄은 훌쩍 멀리 떠나버리고 몇 해째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는 결국 상원의원으로 성공한 알프레드와 결혼한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든 그렇지 못했든 거의 모든 남자는 알프레드처럼 살아간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고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에게 동생은 눈엣가시다. 늘 주위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는 영원한 경쟁자인 동생이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이 성실하고 매력 없는 사내가 마음으로 몰래 꿈꿔 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의 전설'의 원제는 '레전즈 오브 더 폴(Legends of the Fall)'이다. 우리말 제목이 실은 '추락의 전설'의 오역(誤譯)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어차피 가을은 추락의 계절인 것을.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건 오히려 '전설'이라는 단어다. 형에게 가족을 맡기고 사라진 나쁜 남자 트리스탄은 결국 대자연 속에서 곰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아무리 흔들려도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형들'에게 그는 끝까지 아련한 전설로 남아 은밀한 대리만족마저 선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