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통화는 올드 패션… '약한 통화' 스타일이 대세

'통화 가치는 강하거나, 최소한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많은 나라가 오랫동안 금과옥조로 삼아온 원칙이다. 강한 통화는 국가 신인도의 표상이었고,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런 원칙이 깨지고 있다고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했다. 선진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가 어떻게 하면 통화 가치를 떨어뜨릴까 고민하고,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오히려 환호한다는 것이다. 약한 통화는 수출 경쟁력을 높여주고 자금 사정을 완화시켜 경기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강하고 안정적인 것은 적어도 통화의 세계에서는 '올드 패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통화 가치 상승은 수입 물가를 낮춰 물가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무서운 요즘과 같은 상황에선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과 일본, 유럽이 경쟁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양적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통화를 공급하는 것)' 조치를 시행해 자국 통화를 약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런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스위스에 돈이 몰려와 스위스프랑화(貨)의 가치가 치솟자 스위스 중앙은행은 스위스프랑 가치를 유로화에 연동시키는 극약 처방까지 취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돈을 찍어 돈값을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나라가 통화 가치 상승에 족쇄를 채우고 나오면 투자자들은 새로운 표적을 찾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정책은 다른 나라의 정책으로 파급되기 쉽다. 세계 각국이 저마다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통화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이유다.

통화 당국 입장에서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통화 가치를 올리는 것에 비해 훨씬 손쉽다. 후자는 유한한 외환보유고를 사용해야 하는 반면, 전자는 돈을 더 찍어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돈 찍어대도 안 떨어지는 통화 가치

그러나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이런 노력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은 2001년부터 다양한 양적완화 장치를 실행했지만, 엔화 가치는 오히려 최근 2~3년 새 치솟고 있다. 지난달에도 일본 중앙은행은 채권 매입 규모를 10조엔 늘리는 추가 양적완화 조치를 내놨지만, 달러당 엔화 가치는 78엔대에서 요지부동이다. 일본이 원하는 달러당 80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 역시 2008년 이후 3차례에 걸쳐 양적완화 조치를 폈지만, 결국 달러 가치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그래픽 참조〉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노력이 불발에 그치는 이유를 이코노미스트는 두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금리 차이에 따른 환율 조정 과정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투자자들은 보통 금리가 낮은 나라에서 돈을 빌려 이를 금리가 높은 국가에 투자해서 수익을 올리는데(이를 재정거래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금리가 높은 국가의 통화는 그만큼 수요가 늘어 자연스레 가치가 오른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주요 선진국들이 금리 인하에 나서 금리가 저마다 0%에 가까워지고 금리 차이가 사실상 사라지다 보니 어느 한 나라에서 금리를 내려본들 효과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최근 환율은 경제의 펀더멘털보다는 '위험(risk)'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몰아치는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그래도 달러나 엔화 같은 통화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져도 두 나라에 세계의 돈이 모여들어 통화 가치가 오른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무역적자를 내면 외화 지급수요가 늘어 통화가치가 떨어진다는 원칙도 작동하지 않게 됐다. 예를 들어 미국과 일본은 무역적자를 보는데도 환율은 오히려 평가절상되고 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의 경험에 비춰보면 기이한 현상이다. 당시 한국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경상수지 적자였다. 외국계 투자자들이 2008년 한 때 한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것을 빌미로 원화 약세에 베팅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요즘 외환시장은 과거 '나쁜 행동'으로 응징했던 무역적자를 더 이상 벌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