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빛, 고궁의 밤을 깨우다

어둠이 깔린 덕수궁 중화전(中和殿·보물 제819호). 장중한 진혼곡과 함께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고, 지붕이 무너졌다. 40초간의 침묵과 암흑. 이윽고 화염에 휩싸인 전각이 사라지더니 다시 수백 개의 분신(分身)을 뿜어내며 재건되기 시작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류재하(52·사진)가 8대의 빔 프로젝터로 중화전 전면(前面)에 쏘아 올린 미디어 영상 '시간'이다. 7분 30초짜리 이 작품은 1902년 독립자주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건립됐다 불타고 중건된 중화전의 영욕(榮辱)을 상징한다. 관람객 신예진(27·대학생)씨는 "덕분에 잊힌 역사를 되새기게 됐다. 서글프기 그지없어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요즘 미술계에서 가장 화제의 전시는 덕수궁 전각과 후원에 현대미술 작품을 설치한 '덕수궁 프로젝트'. 류재하의 미디어 영상은 "엄숙하게만 느껴졌던 궁(宮)을 대중 친화적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낮보다 해 질 녘에 보는 게 더 좋다"고 소문이 난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다.

경북대 미술학과 교수인 류재하는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죽 대구에서 활동 중인 작가. 서울 미술계에서 크게 주목도가 높은 작가는 아니다. "당신들은 당신들대로, 나는 나대로. '중앙으로 진출하겠다'는 마음조차 내가 한 수 지고 들어가는 건데 뭐 그리 중요하냐"며 작업에만 몰두해 온 그를 발굴해낸 사람은 이번 프로젝트 기획자인 김인혜(38)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스펙터클한 '한 방'을 고민하던 김 연구사는 지난 3월 핵안보정상회의 때 류씨가 서울 코엑스에 설치한 솟대 모양 작품 '천지인'을 떠올렸다. 전시 개막 석 달 반 전에 섭외에 성공했지만 이번 작업은 작가에게도, 기획자에게도 '도박'이자 '모험'이었다. 중화전은 화려한 단청 때문에 자칫 작품이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 미술관 측은 "차라리 단색인 덕수궁미술관 건물에 작업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전통 건축에 영상을 쏘는 게 내 꿈이었다"는 작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작가는 중화전 5분의 1 크기 모형을 만들어 수백 번 실험을 거듭했고, 기획자는 믿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달 18일 저녁, 400여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작품이 상영됐다. 웅장하고, 숭고한 감성에 좌중이 숙연해졌다. "선생님, 너무너무 슬퍼요." 김 연구사가 작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잔뜩 긴장한 작가의 떨림이 손끝까지 전해져 왔다. 미술관의 애정과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작가는 상영일마다 작품을 업그레이드해 갖고 온다. 덕수궁 프로젝트는 12월 2일까지, 류재하 미디어 작품 상영은 10월 18~20일 오후 6시 30분, 11월 8~10일, 15~17일 오후 6시. (02) 2022-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