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17 03:05 | 수정 : 2012.10.17 10:50

[7년 동안 '나눔의 집' 할머니들 돌보는 나가마 가즈코씨 이야기]
1945년 광복직후 살해 위협… 한국 청년 日行배편 마련해줘
할머니들, 처음엔 안 반겼지만 이젠 동생같이 챙겨줘

나가마 가즈코(70)씨는 1942년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나 원산부근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체육 교사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 살이던 1945년 일본이 패전했다. 나가마씨 여섯 식구는 피난길에 올랐지만, 누구도 잠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가족은 러시아 군인에게 붙잡혀 살해될 위험을 가까스로 넘기기도 했다.

이때 25세 한국 청년이 가족을 구했다. 일본인에 분노하던 주변을 달랬고,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배편을 안내했다.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당시 세 살에 불과했던 나가마씨가 이 일을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가 "보답하고 싶어도 이제 그 청년을 찾을 수 없다"며 매일같이 눈물지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도 TV에서 위안부 이야기가 나오면 "거짓말이다. 실제로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니"라고 나가마씨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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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직후 한국 청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나가마 가즈코(70·가운데)씨가 16일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할머니들 손을 잡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가마씨는 무작정 위안부 할머니들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2004년 10월, 나가마씨가 예순둘 되던 해였다. "우리 가족을 살려준 한국에 고맙고, 위안부 할머니께 죄송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첫 만남은 강렬했다. 나가마씨는 "할머니들이 아직 일본군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어 무서웠다. 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이었던 것 같다"며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울음이 목까지 차올랐다"고 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나가마씨에게 "잘 가고, 꼭 다시 와"라고 손을 흔들었다.

이후 7년 동안 나가마씨는 해마다 나눔의 집을 찾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쉬지 않는다. 위안부 관련 토론회를 열기도 하고, 주변에 나눔의 집이 어떤 곳인지 알리기도 했다. 일본군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처음 나가마씨를 보곤 "쟤(일본인)는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오지 말라고 해라"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묵묵히 허드렛일을 하는 그를 보고 이제 "동생 같고 가족 같다"고 한다.

16일 오전 나눔의 집에서 만난 나가마씨는 허리 굽혀 위안부 할머니를 부축하고, 방을 청소했다. 일본말에 능숙한 배춘희(89) 할머니와는 함께 일본 전통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도쿄에서 30여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나가마씨는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일본 교육이 문제"라 했다. 자신도 학생들에게 일장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의 의미를 가르쳤지만, 위안부 문제를 교육한 적은 없다고 했다. 교사인 자기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가마씨는 일본 사람의 80% 정도는 위안부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납치(拉致)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간다는 뜻인데, 일본 정부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은 북한이 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했다고 흥분하면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납치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본 정부와 극우 인사들이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위안부가 강제였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어떤 정치인은 말하죠.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들이 바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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