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17 22:03

솔숲 사이로 일출 보이는 '칠보산'
편백나무 100만그루 자라는 '남해'
잣나무 '청태산', 소나무 '대관령'
산림청, 작은 결혼식 장소로 개방
신록과 단풍 속 신랑 신부 손잡고 싱그러운 자연의 축복 흠뻑 누리길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방 안으로 어슴푸레 빛이 스며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창 너머 솔숲 사이로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건 바다가 분명했다. 그 위로 불덩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동해 일출을 보는 자연휴양림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방에서 해맞이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바닷가 7번 국도에서 8㎞나 꼬불꼬불 들어온 산속에서.

커피 한잔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통나무 집을 에워싼 금강송 줄기들이 햇살을 수평으로 받아 더욱 붉다. 청신한 아침 공기, 알싸한 솔향을 달콤한 커피에 타 마셨다. 이보다 맛있는 봉지 커피도 드물 것이다. 지난달 늦은 휴가길, 경북 영덕 칠보산자연휴양림 숲 속의 집에서 그렇게 첫 아침을 맞았다.

이튿날 아침엔 휴양림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1.6㎞ '칠보 숲길'을 걸었다. 우아하도록 늘씬한 금강송 숲 사이로 난 길이다. 휴양림 들어오는 산길에서부터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더니, 칠보산은 울진 금강송 군락지 못지않다. 산책로가 끝나갈 무렵 정자처럼 꾸민 전망대가 있다. 휴양림 하늘이 맑아서 동해가 잘 보이겠거니 싶어 올라갔다. 코앞 산줄기를 짙은 운무(雲霧)가 뒤덮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산중 날씨, 변화무쌍하다.

숲 속의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차려 먹었다. 떠날 채비를 하는데 창밖이 어둑해진다. 아까 봤던 운무가 야금야금 밀려들고 있었다. 송림과 앞마당까지 온통 뿌옇게 덮이도록 한참을 넋 놓고 창가에 서 있었다. 운무가 새소리까지 삼킨 듯 사위가 고요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경남 남해 편백휴양림엔 여의도 한 배 반만 한 산림에 마흔 살 넘은 편백나무 100만 그루가 자란다. 사철 푸르른 편백은 '공중의 비타민'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뿜는다는 나무다. 남해군 삼동면 대기봉 자락, 휴양림 전망대에 올라서면 맑은 날 남해의 남쪽 바다가 바라다보인다. 광활한 편백숲에서 위안과 생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산림청 휴양림 서른일곱 곳 중에 가장 인기 있다. 지난여름 예약 추첨에선 숲 속의 집 경쟁률이 485대 1에 이르렀다.

강원도 횡성 청태산휴양림엔 15m쯤 헌칠하게 뻗은 잣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도록 빽빽하다. 잣나무 숲 사이로 데크 길을 지그재그로 놓아 휠체어 탄 장애인도, 유모차 탄 아기도 숲을 즐길 수 있다. 강릉 대관령휴양림은 쉰 살에서 많게는 이백 살 된 소나무 숲이 계곡과 어우러져 탈속(脫俗)한 듯하다. 경기도 가평 유명산휴양림과 충남 서천 희리산휴양림은 못 가봤지만 역시 아름답고 호젓한 곳으로 이름났다.

이 자연휴양림 여섯 곳을 산림청이 '작은 결혼식' 예식장으로 내놓았다. 호텔 호화 결혼식, 하객이 줄 서는 과시 결혼식을 마다하고 자연 속에 가족·친지가 모여 혼례 치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휴양림은 잔디밭 광장, 숲 속 수련장을 갖추고 있어서 야외 결혼식에 딱 알맞다. 날씨가 궂어도 너른 강당이 있다. 유명산휴양림은 수도권에서, 대관령휴양림은 영동권 도시에서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된다. 칠보산휴양림과 남해 편백휴양림, 청태산휴양림은 외진 편이지만 찻길이 잘 닦여 있어 나들이하듯 나서기 좋다.

이돈구 산림청장은 "숲에서 신랑 신부가 등장하는 결혼식만큼 아름다운 예식이 없다"고 했다. "원한다면 숲 속 결혼식에서 기꺼이 주례를 서겠다"고 했다. 하긴 봄 신록과 가을 단풍 속 신부는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신랑 신부를 축복해주면서 맑은 공기, 싱그러운 자연까지 누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즐겁겠는가. 산림청은 시설을 다듬어 11월부터 예식장을 연다. 이용료나 대관료는 없고 단체 입장료 700원씩과 주차료 3000원씩만 받겠다고 한다. 식당이 없는 게 단점이지만 산림청은 출장 연회 업체를 불러들여도 괜찮다고 말한다. 청태산휴양림처럼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곳에선 바비큐 파티를 벌여보는 것도 야외 결혼식에 제격이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숲은 우리네 삶에서 '배 속에서 사후(死後)까지' 함께 가는 동반자다. 휴양림과 국유림에는 임신부를 위한 '숲 태교' 프로그램이 있다. 아이를 낳으면 '탄생목(木)'을 심게 하고 유아 때부터 자연과 가깝게 해주는 '숲 유치원'도 운영한다. 어린이·청소년에겐 숲을 가르쳐 정서를 살찌운다. 물론 가족의 쉼터로 숲만큼 좋은 곳도 없다. 아이들 게임중독부터 어른들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치유의 숲'도 곳곳에 있다. 죽어서는 나무 아래 유골을 묻는 수목장을 치른다. 그리고 숲은 제 발치에 잠든 영혼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숲은 생활이자 복지(福祉)다.

이제 인륜대사 결혼이 더해져 일생에 걸친 숲의 역할이 한결 풍성해졌다. 기왕에 숲 결혼식을 올린다면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휴양림 숲 속의 집에서 묵는 건 어떨까. 찬란한 일출을 마주하거나 꿈처럼 운무에 싸이는 신혼 아침의 감동은 어떤 밀월 여행지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