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17 21:33

지분 5% 정도 투자한 뒤 지배구조 개선, 수익 내는 식… 3000억원 투자금 운용
초기 일부 기업 성과냈지만 의견 묵살당하며 위상 추락… 수익 나빠지자 투자금 환매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첨병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른바 '장하성 펀드'가 별 성과를 못 낸 채 출범 6년 만에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17일 자산운용 업계에 따르면, 라자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이하 라자드 펀드)가 연내 청산을 목표로 보유 자산을 대부분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펀드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펀드로, 2006년 4월 미국의 사모(私募) 펀드인 라자드자산운용이 만들었으며, 소액 주주 운동을 펼쳐온 장하성 고려대 교수에게 자문한다고 해서 '장하성 펀드'로도 불린다.

이 펀드는 한때 3000억원에 가까운 투자금을 운용했고,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캘퍼스)도 2008년에 1억달러를 투자했다. 자산운용 업계 관계자는 "저조한 수익률에 실망한 캘퍼스가 최근 투자금을 모두 환매했으며, 라자드는 펀드를 연내에 청산하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공시 자료에 따르면, 라자드 펀드는 올 들어 대한화섬·대한제분·삼양제넥스 등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던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나머지 주식도 8~9월 중 집중 매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 교수와 라자드 펀드 측은 펀드 청산 방침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고 있다. 장 교수는 "나는 단순히 펀드 어드바이저일 뿐, 펀드 청산에 대해선 내가 말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라자드 코리아 측은 "펀드 청산 여부는 미국 본사에서 결정할 일"이라고만 답했다.

◇펀드 청산은 투자 성적 부진 때문

라자드 펀드는 출범 초기 공격적인 활동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 8월 태광그룹 계열사인 대한화섬 지분 5.15%를 매입하고 태광을 압박해 지배구조 개선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대한화섬 주가가 급등해 그해 연말 라자드 펀드의 수익률은 40%를 웃돌기도 했다. 이후 라자드 펀드는 2007년 6개 기업에 사외이사와 감사를 선임하는 데 성공했고, 2008년엔 4개 기업에 사외이사와 감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 뒤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태광산업과 남양유업은 라자드 펀드의 배당 확대 요구를 잇달아 묵살했다. 2010년엔 일성신약이 추진하던 씨스코통상과의 합병을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주총에서 그대로 통과돼 체면이 깎이기도 했다.

이 같은 위상 추락은 저조한 수익률로 이어졌다. 라자드 펀드의 상대적 부진은 같은 투자 모델을 가진 알리안츠자산운용의 지배구조개선 펀드의 수익률과 비교해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지난 6월 말까지 최근 3년간 수익률을 보면, 알리안츠가 60%를 웃도는 데 비해 라자드 펀드는 3%대에 불과하다. 최근 1년간 수익률도 알리안츠가 -8%인데, 라자드는 -28%를 기록했다.

◇장하성 펀드의 실패 이유는?

애초 장하성 펀드는 특정 기업의 지분을 취득한 뒤 지배구조 개선 활동을 펼치고, 그 결과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 기업과 주주가 윈-윈(win-win)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적어도 투자자는 재미를 못 본 셈이다. 라자드 펀드는 알리안츠 펀드에 비해 왜 이렇게 투자 성적이 부진한 걸까?

전문가들은 라자드 펀드의 실패 요인으로 한국적 투자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을 꼽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5% 지분만 가져도 주주의 정당한 문제 제기에 대해 대주주가 요구를 수용하고, 시장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강력한 오너십에 의해 소수 의견이 묵살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광그룹의 경우 처음엔 의견을 존중하는 듯하다 라자드 측의 사외이사 선임 요구를 묵살했는데, 지분 70%를 가진 대주주가 힘으로 제압하니 라자드 측이 힘을 쓸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위험을 피하려면 대주주의 지분이 30% 이상 되는 곳은 가급적 피했어야 하는데, 라자드 펀드는 '명분'만 믿고 '적대적 개입'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목표 기업 선정을 잘못한 것이 실패 요인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한 전문가는 "2000억~3000억원대 투자 자금으로는 대형주 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중소형주 위주로 선별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 뉴욕에 있는 라자드 펀드 투자 책임자는 한국의 대형주에는 밝지만 중소형주에 대해서는 잘 모르던 사람이라 투자 포트폴리오를 잘 짜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기업지배구조원 강병호 원장은 "투자자들에게 기업지배구조 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 펀드를 통해 주주 행동주의를 실천한 실험정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지배구조펀드

잘못된 지배구조로 인해 주가가 저평가돼 있는 기업을 골라, 주식을 사들인 뒤 기업을 압박해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투자 수익을 거두는 펀드이다. 사외이사·감사 등을 파견하고 배당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등 기업 경영에 직접 개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