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떠돌던 고려 불경 되찾은 날, 얼마나 기쁘던지…"

"대단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니 반드시 입수해야 합니다."

1971년 윤장섭<사진>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에게 고향 선배인 황수영(1918~2011)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연락을 했다. 고려 사경(寫經) 1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문화재 수집에 갓 눈을 뜬 윤 이사장은 황 관장의 귀띔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재일교포인 사경 주인은 첫 만남에서 별 얘기 없이 "내일 보자"고만 했다. 이튿날 호텔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윤 이사장에게 물건을 넘겨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40여년간 해외를 떠돌던 고려 사경은 그날 윤 이사장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윤장섭(90) 이사장은 문화재와 인연을 맺은 지난 40여년간 가장 애착이 가는 유물로 이때 입수한 고려 '백지묵서묘법연화경'을 꼽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재일교포 소장자가 그날 밤 황 관장께 전화를 해서 '윤 선생이 황 관장께서 보낸 사람이 틀림없느냐'며 재차 확인했다더군요. 황 관장과 사전에 사경을 고국에 돌려보내기로 약속했는데, 다시 일본 수집가에게 비싼 값에 팔릴까 봐 염려했던 거지요." 이 고려 사경은 나중에 국보 211호로 지정됐다.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윤 이사장은 농약업체인 성보화학 창업주로 기업경영에 바빴던 사업가였다. 그러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황수영 선생,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장을 지낸 진홍섭 이화여대 교수 등 박물관계 '개성 3걸(傑)'로 꼽히는 동향 선배들과 어울리며 1971년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다. 1982년 서울 대치동 상가 3층에 호림박물관을 열었고, 1999년 호림박물관 신림 본관, 2009년 신사 분관을 세웠다.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은 호림박물관은 국보 8건·보물 46건을 포함, 1만5000점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국내 명문 사립박물관으로 성장했다.

17일 서울 강남의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만난 윤 이사장은 최순우 관장 얘기를 많이 했다. 최 관장은 170통 가까운 편지를 주고받으며, 윤 이사장이 문화재 수집가로 성장하는 데 '과외 교사' 노릇을 했다. "최 관장은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분이었어요. 언젠가 그림인지 글씨인지 간단한 물건을 선물로 드렸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내 이름으로 기증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최 관장의 조언은 직설적이었다. 살 물건과 절대 사지 말아야 할 것, 가격을 조정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일러줬다. "1974년 최 관장이 간결하면서도 한국적 미가 뛰어난 청화백자를 꼭 사야 한다고 해서 4000만원을 주고 구했습니다. 서울 종로에 작은 빌딩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이 물건이 훗날 국보 222호로 지정된 청화백자매죽문호다.

문화재 분야에선 '개성 3걸'을 비롯, 평생 모은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故) 동원 이홍근 선생과 최영도 변호사 등 개성 출신들이 많다. 얼마 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하고, 50년 동안 가꾼 경기도 용인·안성의 시가 1000억원 임야를 국가에 기증한 손창근(83) 옹이 윤 이사장의 고종사촌이다. 윤 이사장은 "고도(古都)인 개성에서 자라서 자연스레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다른 시대보다는 고려시대 청자나 불화, 불경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18일부터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는 개관 30주년 특별전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엔 명사들이 뽑은 호림박물관 명품 30선, 국보·보물 46점과 함께 윤 이사장이 아끼는 작품 10점 등 80여점을 선보인다. 2013년 4월 27일까지. (02)541-3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