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Why] 서울 한복판서 뜨개질 하는 캐나다 남자… 그는 왜?

점심부터 해질녘까지

한국은행 앞서 6개월 뜨개질
수제 모자 30점 색깔별 전시
인터넷에 이름 오르내리기도

한국에서 배운 뜨개질 기술로
캐나다 돌아가 사업하는게 꿈

원래는 '이태원 뜨개질 아저씨'

90년대부터 日서 영어강사
한국 건너와 영어 가르치다
뜨개질 반해 이태원서 시작

왜 한국은행 앞이냐 물으니
"서울 중심에 있는 느낌 들어"

관광객처럼 보이는 50대 백인 남성이 길에서 뜨개질을 한다. 서울 한복판인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 앞에서 바늘 코를 뜨고 있다. 그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형형색색의 모자 30여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점심 무렵부터 오후 5~6시까지 거의 매일 벌써 반년째다. 인터넷에는 종종 그의 사진과 '대체 누굴까'라는 글이 올라온다.

뜨개질 주인공은 캐나다인 캘빈 필립스(Calvin Phillips·55)씨다. 지난 17일 한국은행 앞에서 만난 그는 "안녕하세요. 실이 좋아요"라는 서툰 한국말과 함께 직접 뜬 모자와 가방 등을 행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배운 뜨개질 노하우로 캐나다에서 내 사업을 펼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는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박물관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소규모 박물관을 비롯해 건물 벽화 작업, 가구 손질 등 손으로 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한다. 그러다 33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영어 강사가 됐다. 캐나다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이 "일본 구경도 할 겸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쳐봐라"고 한 말이 계기였다.

2005년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 영어 강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해 캐나다 대사관 직원들이 주최한 파티에서 강재석(68)씨를 만난 게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강씨는 옷 수출, 실 도매상 등을 하며 뜨개질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그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간 적도 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부터 뜨개질에 관심이 있었던 필립스씨는 이날 직접 뜬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는데, 이 물건을 본 강씨가 "제대로 배워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어렸을 적부터 손으로 하는 것이면 뭐든 좋아했죠. 그 머플러도 독학으로 익힌 뜨개질로 만들었습니다. 강사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처럼 손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더군요. 사람을 쓱 보고는 옷 치수를 계산해내는 강씨를 보고 '아, 저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씨는 필립스씨의 선생님이 됐다. 강씨의 서울 인사동 가게에서 뜨개질을 하던 필립스씨는 2008년부터 아예 이태원에서 뜨개질을 하며 물건을 팔았다. 사람들은 그를 '이태원 뜨개질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랬던 그가 한국은행 앞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저가 상품 위주인 이태원 분위기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서울 종로세무서 뒤편에 강씨와 함께하는 '캐시미어 니트'라는 가게가 있지만 어느 곳보다 한국은행 앞이 좋다고 했다.

"답답한 가게 안에 있는 것보다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는 밖이 좋아요. 게다가 인사동이든 이태원이든 중국산 저가 제품이 너무 많아요. 저는 이것도 일종의 '공해'라고 봅니다. 한국은행 앞은 유동 인구가 많아 판매에도 도움이 되는 데다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가 파는 모자는 보통 5만원에서 비싼 것은 10만원을 넘기도 한다. "이탈리아나 페루산(産) 고급 실을 쓸뿐더러 모자 하나를 뜨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만큼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에요. 값어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 줍니다."

"꼭 물건이 팔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 못 팔면 내일 팔 수 있겠죠. 무언가 사람들이 아름다운 걸 볼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와 제 모자들, 길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예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만입니다."

그의 선생님 격인 강씨는 "2~3년 전만 해도 많이 서툴렀는데 지금은 45년 동안 뜨개질한 나보다도 낫다. 캐나다로 보내 독립시켜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