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2002 월드컵 유치, 코엑스 건설 주역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주역이자 재계를 대표하는 '국제통'으로 유명했던 구평회(86) E1 명예회장이 20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6형제 가운데 다섯째로, LG그룹 성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월드컵축구 유치위원장을 맡아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를 일궈냈고, 한국무역협회 회장 시절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 건설을 주도했다.

고인은 192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5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럭키화학(현 LG화학)에 입사, 기업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부터 3년 가까이 럭키화학 1호 해외주재원으로 미국 뉴욕에서 근무했다. 당시 현지 기업 연구원과 교분을 쌓으며 배운 처방을 통해 최초의 국산 치약 '럭키치약'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 당시 각광받던 플라스틱이 원유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는 정유회사에 대한 꿈을 품게 됐다. 정부를 설득한 끝에 외자를 도입하고 미국 칼텍스와 합작해 1967년 호남정유를 세우면서 오늘날 GS칼텍스로 성장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칼텍스 측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침착하고 꾸준하게 상대를 설득해 원하는 바를 얻어낸 끈질긴 협상가였다. 칼텍스 측은 나중에는 "P.H. Koo(구평회)와 이야기하면 피곤하다"며 그의 집요함에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고인은 1984년에는 한국 최초의 LPG(액화석유가스) 전문회사인 여수에너지(현 E1)를 설립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LG그룹에서 분리돼 나온 LS그룹의 큰 어른 역할을 했다.

고인은 재계를 대표하는 '국제통'으로도 정평이 났다.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미경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국제 민간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이 앞서 있던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도 FIFA 외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닌 끝에 결국 공동개최를 이끌어냈다. 구 명예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할 정도로 열정적 삶을 살았다고 직원들은 전했다.

구 명예회장은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수상했다.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고, 서울대 문리대 동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는 등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빈소를 찾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우리 집안에서 가장 똑똑하고 영어를 잘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자녀로는 장남 구자열 LS전선 대표이사 회장, 차남 구자용 E1 대표이사 회장, 3남 구자균 LS산전 대표이사 부회장, 딸 구혜원 푸른저축은행 대표이사 회장 등 3남 1녀가 있다. 이제 창업주 6형제 가운데 넷째 구태회(89) LS전선 명예회장만 생존해 있다.

고인의 장남 구자열 LS전선 회장은 "아버지는 '묵묵히 일하고 깨끗이 떠난다'는 평소 원칙을 지켜온 참 기업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20호실이며, 발인은 24일 오전 7시 50분. 장지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광주공원묘원. (02)3010-2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