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전문가 10명중 8명 "재벌, 또다른 계열사 동원할 것… 근본 대책 안돼"

올해 대선의 최대 쟁점 현안 중 하나가 바로 재벌그룹의 기존 순환출자 지분 해소 문제다. 뱀이 꼬리를 물 듯 재벌 계열사가 지분을 돌려가며 소유해 오너가 적은 돈으로 천문학적인 가치의 대기업 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행태를 뜯어고치자는 것이다. 공약이 현실이 되면, 재벌과 그 주변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경제개혁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재벌그룹은 총 15곳이고, 이를 모두 해소하려면 9조6600억원의 주식이 처분돼야 한다. 재벌이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이 주식을 오너나 다른 계열사가 사들여야 하니 그만큼의 비용이 드는 셈이다. 물론 이 돈이 공중으로 증발하는 것은 아니며, 주식을 파는 계열사 입장에선 수입이 된다.

순환출자 해소는 연결고리 중 어느 한 곳만 끊어도 되는데, 경제개혁연구소는 가장 주식 가치가 적은 고리를 끊을 때의 비용을 계산했다. 착한자본주의연구원은 이 비용을 10조7296억원으로 추산했다. 재계에선 이 비용을 훨씬 크게 본다. 본지가 주요 대기업 4곳의 기획ㆍ전략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지분 해소 비용이 최소 20조원, 최고 30조원까지 들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다른 계열사 동원해 지분 인수

순환출자 해소 조치가 시행될 경우 재벌들은 순환출자 관계가 없는 그룹 내 계열사를 동원해 지분을 인수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하다. 삼성 등 대부분 재벌그룹의 경우 워낙 계열사가 많아 순환출자 해소 부담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다. 이렇게 되면 오너의 그룹 지배력에는 변화가 없고, 왜 순환출자 해소를 들고 나왔는지 여론의 비판이 고조될 수 있다. 차기 정부는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함으로써 재벌의 지배구조가 복잡한 '환상형(環狀型)'에서 단순하고 감시가 쉬운 지주회사 형태로 변화하는 첫발을 뗀 의미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본지가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 10명에게 물어보니 이 중 8명이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었다. 순환출자 해소 정책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근본 대책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순환출자 해소에 다른 계열사들이 동원될 경우 불필요한 데 돈을 썼다는 이유로 해당 기업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 주주들이 집단 반발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또 현대차그룹처럼 순환출자 해소 비용이 크고, 비주력 계열사의 사이즈가 작은 경우엔 계열사를 동원하는 방법으로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게 쉽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아자동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을 정리하는 데만 약 4조4800억원이 소요되는데, 순환출자 관계가 없는 다른 계열사들이 이 돈을 마련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순환 출자 관계가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의 매출 비중이 그룹 전체의 65%가 넘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현대카드나 현대캐피탈이 나설 경우 자금 동원은 가능하지만, 이들은 현대자동차가 이미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 또 다른 순환출자 고리가 형성될 수 있고, 금산(金産) 분리(산업자본의 금융회사 소유 규제) 규정에 위반될 소지도 있다.

세금을 포함한 거래 비용 문제도 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주식이 처분되면서 발생하는 자본이득에 대한 세금(법인세)이 4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너 일가가 대출로 주식 사들여야

계열사 동원이 여의치 않을 경우 총수 일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오너 개인 재산으로 순환출자에 해당하는 주식만큼을 사들이는 것이다. 정치권에선 재벌들이 이 방식을 택하기를 기대한다. 오너 지분이 높아져 '소유와 책임'이라는 기업 지배의 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너가 어디서 돈을 마련하느냐이다. 오너의 재산은 대부분 주식인데 기존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이를 팔 수는 없고, 은행에 주식을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은행이 특정 재벌 오너에게 천문학적인 대출을 해주겠다고 나섰다간 특혜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남는 방법은 계열사와 총수 일가에 우호적인 세력이 지분을 인수해 주는 것이다. 이른바 '백기사'를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연기금, 외국계 펀드 등이 후보다. 그러나 연기금은 "재벌의 그룹 지배를 돕는다"는 비판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외국계 펀드의 경우 재벌이 당장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장차 경영 간섭이나 수익률 보장 요구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 지분을 시장에 공개적으로 매각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경영권도 잃고 주식 가치도 폭락시킬 우려가 있어 재벌이 검토 대상에 넣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부가 규제를 만들어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던 과거 재벌의 행태를 볼 때 이번에도 기상천외의 우회수단을 찾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나왔던 에버랜드 CB(전환사채) 편법 발행 같은 꼼수가 또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년 이후 경제 상황이 극히 비관적인 상황에서 재벌들이 투자 위축 등을 이유로 격렬하게 반발할 경우 정부가 한발 물러서 타협안을 낼 가능성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순환출자 해소 유예기간을 지금 거론되는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거나, 순환출자 주식을 전부 처분하지 않고 50%만 처분해도 되도록 하는 타협안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분리되는 회사 주가 급락할 수도

순환출자 해소로 총수가 일부 계열사의 경영권을 잃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해당 계열사는 경영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한 재벌그룹 임원은 "그룹 내부 거래관계가 끊어져 매출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분리된 계열사의 경영 부진은 해당 기업이 직원을 줄이거나, 협력회사들의 경영이 악화되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문제로 해당 회사의 주가가 급락할 수도 있다. 최근 안철수 후보가 안랩 주식 100만주를 사회환원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주가가 일주일 가까이 급락했던 전례가 있다. 안철수가 없는 안랩의 경영 안정성을 우려한 시장의 반응이었다.

반대로 순환출자 해소 문제로 경영권이 불안해지면 경쟁업체나 외국계 사모펀드들이 적대적 M&A를 시도할 수 있고, 이 때문에 해당 기업의 주가가 오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