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 찾는 탈북자들, 선배로서 도와야죠

이화여대 북한학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3학기째 재학 중인 허서진(50)씨는 국내 첫 탈북자 출신 '한국정보화진흥원 컴퓨터 강사'다. 2001년 탈북한 허씨는 북한에서 청진고등경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회사에서 회계와 재정총괄 관리 업무를 했었다. 허씨는 한국에 와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허씨는 "북한에선 주판을 이용해 회계를 했다"며 "남한은 단위가 커 주판을 쓸 수도 없고, 무엇보다 더 이상 주판이 없더라"고 했다.

허씨는 2002년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컴퓨터부터 다시 배웠다. 한국에서 회계를 하려면 반드시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컴퓨터 공부를 했지만, 그땐 컴퓨터 없이 책으로만 배웠다. 다행히 북한에서 배운 이론 덕에 허씨는 1년 동안 컴퓨터활용능력, 전산세무 2급, 인터넷 정보 검색사, 전산회계 1급 등 6개의 자격증을 땄다.

당시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딴 사람이 탈북자 60명 중 허씨를 포함해 딱 2명에 불과했다. 허씨는 "대부분 북한에선 컴퓨터를 접해보지 못했고, 한국 컴퓨터 이론엔 영어가 많아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다"고 했다. 허씨는 탈북자들에게 영어 용어를 북한 용어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돈 단위가 커서 이해하기 어려운 건 작은 단위로 바꿔 설명해줬다. 차츰 허씨에게 컴퓨터를 물어보는 탈북자들이 많아지자,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아예 허씨에게 '강사'로 나서달라고 제안했다.

2003년 탈북자 출신 첫 컴퓨터 선생이 된 허씨는 교재부터 다시 만들었다. 영어는 최대한 북한에서 많이 쓰는 말로 바꾸고, 문제의 예시 등도 북한에서 많이 쓰는 맥락으로 바꿔 설명했다. 허씨는 자격증 과목도 어렵기만 하고 현실에서 큰 쓸모가 없는 것 대신 취업이나 생활과 밀접한 과목들로 바꿨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허씨가 강의를 맡은 뒤 합격률이 90％까지 올랐다. 전산 회계, 전산 세무 등 전문 자격증을 딴 제자들이 '3D 업종' 대신 회계사 사무실, 세무사 사무실 등에 취직하기 시작했다. 허씨는 "10년간 3000명의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중 절반 정도는 '사무직'에 취직했다"며 "'선생님 나도 사무실에서 따뜻하게 앉아서 일해요'란 말이 제일 듣기 좋다"고 했다.

얼마 전엔 이 교육이 중단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허씨가 컴퓨터를 가르치던 기관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세종시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허씨는 고민 끝에 자비 6000만원을 털어 지난 5월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탈북자들을 위한 컴퓨터학원을 열었다. 자비까지 털어 컴퓨터학원을 만든 이유에 대해 허씨는 "가르침을 통해 나도 도움을 받기 때문"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