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쉰 살의 007… 전통 속 새 역사를 만나다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강력한 의지로 노력하고, 구하고, 찾고, 굴복하지 않으리라.'

"00번으로 시작하는 요원들을 계속 둘 필요가 있느냐"는 총리의 추궁에 MI6 국장 M(주디 덴치)은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맞선다. 이 시구는 MI6뿐만 아니라 007시리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변하고 있다.

'아메리칸 뷰티'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샘 멘데스 감독이 연출한 '007 스카이폴'은 007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이자 역대 23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는 007시리즈의 역사와 전통을 재치 있게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한때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은 이 시리즈가 앞으로도 왜 계속 돼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줄거리는 과거 MI6 요원이었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가 악당으로 변신, MI6 파괴에 나서고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를 막는 해결사로 활약한다는 내용.

본드는 이제 '늙은 개'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퇴물 취급을 받는 신세다. 악당 실바는 키보드 몇 번 두드려서 MI6 본부를 날려버리는데 본드는 체력과 사격 테스트에서 불합격을 받는 데다, 아직도 면도칼로 턱수염을 깎는 '구식' 남자다.

사실 나이 들고 약해진 건 본드만이 아니다. 한때 첩보영화계의 독보적 존재였던 007시리즈는 최근 더 강한 액션과 최첨단 도구를 선보이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첩보 요원의 인간적 고뇌까지 다룬 '본' 시리즈 등에 선두를 뺏겼다.

멘데스 감독은 007시리즈와 본드에 대한 이런 회의를 단번에 불식시킨다. 그는 시리즈의 정수(精髓)만 남긴 채 지난 50년 역사와 전통을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 1964년 작 '007 골드핑거'의 본드카 '애스턴 마틴 DB5'가 옛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가 하면, 전작에 나왔던 첨단 무기들을 비꼬는 등 시리즈의 관습을 비틀거나 놀리는 장면도 나온다. 악당 실바의 매력도 본드에게 뒤지지 않는다. 언제든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고, 언제든 선악의 경계를 넘어설 수도 있는 본드의 본질적 고민을 반영하는, '거울'같은 존재다.

역대 007시리즈 중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힐 만한 이번 작품의 유일한 단점은 '본드걸'이다. '본드걸'이 두 명이나 나오는데도 극의 흐름이나 정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치명적인 매력도 없다. 선과 악, 위엄과 귀여움을 동시에 보여주며 영화를 이끌어간 백발의 M이야말로 이번 영화의 진정한 '본드걸'이다.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것이 포인트!

#장면 상하이의 마천루에서 본드와 악당이 싸우는 장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네온사인에 두 사람의 액션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피 터지게 싸움이라기엔 너무 아름답다.

#대사 “아직도 볼펜 폭탄 같은 거 만드는 줄 알았나요?”(무기개발 담당 Q가 본드에게 하는 대사)

#이런 분 보세요 반세기 동안 007시리즈의 팬이었던 분과 007시리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