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 형 그립습니다… '하늘의 문' 다시 연 벗들

"윤기는 끝을 자른 골프 장갑을 손에 끼고 글을 썼죠. 손가락 마디마디가 버티지를 못했으니까. 1년이면 (200자 원고지) 1만5000장가량 번역을 했어요. 한 달에 한 권꼴인가. 1979년부터는 서대문 로터리에 편집회사 사무실도 함께 차렸어요. 문화계 인사들 소굴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우리 사무실을 '각종 문제 연구소'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라고 불렀어요(웃음)."

22일 밤 서울 광화문의 한 한식당. 경북중 3년 선배이자 평생 지음(知音)이었던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66)가 고인(故人)을 회고한다. 갑상선 항진으로 몇 년째 술을 조심한다면서도, 이날 만은 맥주잔을 비웠다.

이틀 뒤인 24일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은 작가·번역가·신화연구가였던 고(故) 이윤기(1947~ 2010)의 수목장(樹木葬) 2주기. 경기도 양평 작업실 주변에 스스로 심었던 나무 500그루 옆에서 장례를 치른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다.

벗들은 이날을 맞아 그가 1994년에 쓴 첫 장편 소설 '하늘의 문'(열린책들)을 재출간했다. 원래 3권으로 펴냈던 이 장편은 "작가 이윤기의 인생과 문학을 몽땅 담아낸"(문학평론가 이남호) 자전적 소설. 1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아이템으로 절판된 옛 판본을 탐내던 중고 책 수집가들에게는 안된 소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인생과 문학을 사랑했던 독자들에게는 단정한 정병규의 새 장정(裝幀)을 입고, 1088쪽 분량의 한 권으로 태어난 '하늘의 문'이 반갑기만 하다.

전통 종교의 체제에서 이탈해 평화와 구원을 성취하려는 한 떠돌이 사내의 체험적 여정이자 지적 모험인 이 책은, 6·25와 월남전, 연좌제의 고통을 겪었던 작가의 내면 고백이기도 하다. 복간본에서는 7쪽 분량의 세세한 연보를 새로 실었고, 문학평론가 황현산 이남호, 시인 배문성, 정병규가 발문(跋文)을 썼다.

맥주잔을 연신 비우던 문학평론가 황현산(67)은 군 제대 후 학원출판사에서 이윤기와 근무하던 37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렸다. 고인을 '시간의 축지법'을 아는 사내로 호명했다.

"신화 속 존재와 동서양의 모든 영웅, 무훈담이건 소설이건 온갖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가 현실의 생애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같은 자격으로 동일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그보다 더 밀도 높은 공간을 소유한 정신을 끝내 찾은 적이 없다."

생전 이윤기는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수백만 부 베스트셀러가 됐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쓴 신화연구가로서도 그랬지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로서, '장미의 이름'과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번역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엔터테이너로서도 신화적이었다고 선후배 동료들은 애정을 담아 추억했다.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했으면서도 소설 발표에 연연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어학과 종교학에 능하고, 번역을 100권도 넘게 해서 파커 만년필 촉이 다 닳아 없어졌고, 말술도 마다치 않는 호주가이고, 오페라 아리아에서 육자배기에 이르는 유흥적 소양까지도 그야말로 호걸이었다.

때로는 허세와 허풍으로 질투와 힐난도 받았지만, '하늘의 문'은 그 허세와 허풍까지 포함해 이윤기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101가지 길이다. 장대비 이후 기온이 곤두박질한 날이었지만, 이날 밤 광화문은 포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