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르신 찾아가 집안일 돕고… 장볼 땐 茶대접

대형 유통업체가 늘면서 중소상인들이 고전하는 것은 이웃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20년 전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잇따라 입점하면서 위기를 맞은 일본 전통시장(상점가)은 각각의 개성을 살린 차별화된 전략으로 생존 돌파구를 찾았다.

◇전통시장에도 '개인 비서' 역할의 서비스 활발

지난 18일 오후 일본 도쿄 남동쪽에 위치한 시나가와(品川)구 나카노부(中庭)시장. 2006년 일본 중소기업청이 선정하는 '전국 모범시장'에 뽑힌 곳이다. 시장 매출을 정확히 밝히진 않지만 현재 빈 점포가 없을 정도로 영업이 잘된다.

근처에는 대형 수퍼마켓이 두 곳 있다. 그런데도 자전거를 끌거나 장바구니를 든 시민들이 끊임없이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머리가 희끗하게 센 할머니가 양손에 대파, 당근 등 반찬거리가 든 장바구니를 들고 일본 전통과자 전문점 '마루쿄안(丸京庵)'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노란 머릿수건을 동여맨 20대 여종업원이 뛰어나와 짐을 받아 들었다. "비가 와서 쌀쌀하죠? 녹차랑 도라야키(안에 팥이 든 동그란 팬케이크)를 가져올 테니 쉬었다 가세요."

가게 앞에 설치된 테이블 여섯 곳엔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채 단팥빵이나 찹쌀떡을 먹고 있는 할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누구나 편하게 앉아 쉬다 갈 수 있는 장소다.

66년 역사를 지닌 나카노부 시장은 330m 길이 골목에 120개 점포가 한데 모인 상점가다. 1980년대 말부터 골목마다 편의점이 들어서고 번화가에 백화점, 대형마트가 크게 늘면서 시장을 찾는 고객 발걸음이 뚝 끊겼다.

고전하던 상인들이 6년 전 위기 극복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지역 밀착형 '컨시어지(concierge·개인 비서)' 서비스였다. 중산층이 모여 사는 나카노부 시장 일대는 주민의 절반이 50대 이상이다.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혼자 살면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도 많다.

상인들은 자원봉사자 200명을 채용해 주민들에게 전구 갈기, 미닫이문 수리 같은 소소한 편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방문할 때 교통편을 제공하거나 옆에서 부축해주기도 한다. 50세 이상 마을 주민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요금은 시간당 800엔(1만1000원). 회원은 현재 900여명에 이른다. 자원봉사자에게는 시장 상품권을 수당으로 지급한다. 돈과 서비스가 시장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것이다. 전통시장의 컨시어지 서비스는 "편리하다" "친절하다" "재미있다"는 등 소문이 나면서 나카노부 이외 지역에서도 손님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현지 신문, 잡지에 '전통시장의 부활' 모범사례로 여러 차례 소개됐다.

◇채소절임·생선튀김…가게마다 대표 상품 개발

시장에서 판매하는 상품도 주요 고객인 노인들의 생활 패턴에 맞췄다. 식사량이 적은 노인들을 겨냥해 수산물 가게 '산와'는 전복 다섯 조각, 고등어회 열 조각, 단새우 7개 등 깔끔한 비닐랩으로 싼 소포장 제품을 판매한다. 반찬가게는 집에 가져가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쇠고기 감자조림(니쿠자가) 같은 반찬을 우리 돈 2000~3000원에 선보이고 있다. 노인들이 장을 보다 쉬었다 갈 수 있도록 곳곳에 벤치를 만든 점, 가격표 글씨를 여느 시장보다 2배가량 키운 점도 고객 밀착형 서비스로 꼽힌다.

나카노부 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각 점포마다 하나씩 특화상품을 만드는 '일점일품(一店一品)' 운동. 채소가게를 찾아 "대표 상품이 뭐냐"고 묻자, 50대 가게 주인은 진열대 아래 파란 양동이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팔고 남은 배추, 무 조각 등으로 만든 채소절임 반찬이 담겨 있었다. "우리 가게 손님의 90%가 60대 이상이라서 이런 음식이 인기가 좋습니다. 팔고 남은 채소를 활용할 수 있으니 가게도 이익이고요."

정육점에선 생(生)고기는 물론이고, 돈가스와 햄버그스테이크도 판매한다. 생선가게는 매주 목요일마다 정어리 튀김, 빙어 튀김 같은 반찬을 특화상품으로 개발했다. 시장 안에 벌통을 두고 꿀벌을 키워 여기서 채취한 꿀로 나카노부산(産) 벌꿀 케이크, 벌꿀 커피 등을 만들기도 했다. 나카노부 상점가진흥조합(일종의 시장번영회) 요코야마 도시아키(橫山侯明) 이사장은 전통시장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만히 앉아서 손님 오기만 기다린다면 우리가 편의점과 뭐가 다르겠어요? 우리가 먼저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서 힘든 일을 대신 처리해 드리고, 시장에서 뵈면 차(茶)도 대접하니 손님들이 저절로 시장에 찾아오더군요."

☞ 컨시어지(concierge)

호텔 투숙객들의 문의사항에 응답하고 교통편 안내나 공연 티켓 예약 등을 대신 처리해주는 일종의 개인 비서. 중세시대 성에서 각 방을 관리하던 집사에서 유래했다. 유통업계에도 개인 맞춤형 비서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