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윤덕의 사람人] 12년간 세계최고 교육·복지국가 이끈 여걸… 그녀의 최강 리더십은 '사우나 리더십'

타르야 할로넨(Halonen·69)은 포근하고 쾌활한 여자였다. 애칭이 '무민 마마'라더니, 핀란드 동화에 나오는 전설의 동물 '무민(Moomin)'을 꼭 닮았다.

트위터에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을 알리며 슬퍼하는 그녀가 12년(2000~2012) 동안 세계 최고의 교육복지국가인 핀란드를 이끌어온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국가청렴도 1위, 국가경쟁력 1위, 학업성취도국제비교(PISA) 1위, 환경지수 1위는 할로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일궈낸 성취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핀란드인 1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소통'이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세계 최고의 리더들을 현지 인터뷰해 책으로 엮은 '행복의 리더십(알에이치코리아)'에서는 타르야 할로넨의 리더십을 '사우나 리더십'으로 표현했다. 주말이면 사우나를 즐기는 그녀가 일반 시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풍경을 빗댄 것이다.

2000년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할로넨은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실제로 할로넨은 정파에 휩쓸리지 않는 국정운영으로 임기 중 88%에 달하는 국민 지지율을 이끌어냈다. 2006년 대선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할로넨 대통령이 어느 정도의 표차로 승리할 것인가'가 관심사였다.

지난 2월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할로넨은 차기 가장 유력한 유엔사무총장 후보로도 꼽힌다. 17일, 세계여성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할로넨을 주한 핀란드대사관에서 만났다. 최근 출간된 '행복의 리더십'을 받아든 할로넨은 책표지에 자기 얼굴이 보이자 "와우, 여기에 내가 있네" 하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온 국민의 '무민 마마'

―핀란드 국민들은 당신을 '무민 마마'라고 부른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그 나라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다. 북유럽에서 아주 유명한 '무민'은 선하고 정의로운 캐릭터다. 핀란드 국민들은 케이크를 똑같이 잘라 나눠줄 수 있는 무민처럼 내가 모두에게 평등한 정책을 실현할 사람으로 믿고 지지해주었다."

―서울에 오기 전 도쿄에서 열린 '지구환경포럼'에 참석했다. 퇴임 이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대통령직에 있을 때부터 적극 관여해온 유엔의 '지속가능발전회의(Rio+20)'에서 일하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이 기구의 공동의장을 맡았다. 인구개발국제회의(ICPD) 고위급 태스크포스의 공동의장으로도 일한다. 산모의 건강, 생산성, 보건 분야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세계여성지도자협회(the Council of Women World Leaders) 회장직도 맡고 있다. 전·현직 여성 대통령, 총리들의 네트워크다. 여성의 인권과 세계화의 문제도 다루지만 여성 리더로서 갖는 개인적인 고민들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모임이다."

―차기 가장 유력한 유엔사무총장 후보다. 퇴임 후 유엔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도 그걸 염두에 둔 행보일까.

"2006년부터 그런 얘길 들었지만, 어떤 자리를 얻기 위해 유엔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기를 좋아한다. 대통령궁에 있을 때에도 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일하던 시절을 늘 그리워했다."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지지율 88%(2003년)에 이르는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비결이 무엇일까.

"하하! 글쎄, 나도 정확한 비결은 모르겠다. 다만, 정치에서 '진실함(genuineness)'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정직함과 투명함은 최고의 덕목이다. 선거 전이나 후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 특히 내 고향 헬싱키 시민들이 '우리가 아는 할로넨이 대통령이 됐구나, 여전하네' 하며 웃어줄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 리더는 높은 곳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당신은 진짜다(You are real one)'라는 말이 내겐 최고의 칭찬이다."

―'행복의 리더십'이라는 책에 보니 사우나를 무척 즐긴다고 하더라.

"사우나는 다 같이 옷을 벗고 평등해지는 공간이자 문화다. 격의 없는 소통의 장소라 좋다. 유명인사를 초청해 사우나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TV 프로그램도 있었다. 나도 외무부 장관 시절 출연한 적이 있다."

―권력은 부패한다던데, 국가청렴도 1위인 핀란드가 사회 투명성, 정치적 도덕성을 유지해 나가는 비결이 뭘까.

"핀란드는 춥고 혹독한 날씨의 북구에 위치한 나라다. 스스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고, 이웃과의 유대, 결속력이 강해야 사회가 유지된다는 걸 체감하며 살아왔다. 또 하나가 정직함이다. '남자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면 집을 팔아야 한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핀란드 사람들은 정직을 중시한다. 물론 누구나 성자(聖者)가 될 수 없으니 법제도를 통해 사회의 투명성을 구현한다. 어떤 국가에서는 세금으로 도박을 한다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것들을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여긴다던데, 핀란드에서는 매우 사소한 잘못으로도 공직에서 물러난다. 푼돈이라도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속였다면 공직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핀란드를 강소국(强小國)으로 성장시킨 두 개의 축은 복지와 교육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두고 논란이 많다.

"나는 보편적인 복지가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세금을 부유층에게 더 많이 부과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복지 시스템은 부분적인 방편이다. 단지 '좋은 이웃'을 갖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채로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들을 이끌어내야 한다."

―유로존의 경제 위기는 복지의 남발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 않나.

"나는 오히려 유럽의 경제 위기야말로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심각한 글로벌 경제 위기에도 북유럽 국가들은 5% 이상 성장했다."

―양성평등이 복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했다.

"마릴린 먼로가 '다이아몬드는 여성의 가장 좋은 친구다(Diamonds are girl's best friends)'라는 노래를 불렀다. '여성에겐 경제적인 자립이 꼭 필요하다'는 뜻에서 나는 이 노래의 '제목'에 동의한다(웃음). 그런데 나는 다이아몬드보다 '복지가 여성의 최고의 친구'라고 생각한다. 복지사회란 성(性)에 대한 민감성이 높은 사회다. 예를 들어 자녀 양육, 노인 부양 정책을 만들 때에는 여성을 더 지원하고 도와주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삶이 보육과 가족 부양에 더 많이 연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유럽 복지모델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면서 수많은 여성 인력을 배출했다.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 GDP의 40%가 여성에게서 나온다. 여성과 남성 간 고용률 격차가 줄면 GDP가 9~16% 증가한다는 OECD 보고서가 있다."

◇메르켈도, 올브라이트도

―12년 동안 권력의 최고봉에 있었던 당신은 성공한 여성인가.

"단언할 수는 없다. 여성의 성공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니까(웃음). 다만 내가 대통령이 되면서 세상 어떤 분야에도 성적(性的)인 구분과 우위란 존재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는 걸 보여준 것이 기쁘다."

―한국에서는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여당 최초로 여성 대통령 후보를 배출했다.

"박근혜 후보를 만난 적은 없지만 기사를 통해 알고 있다. 굉장히 반갑고 흥미로운 일이다. 핀란드에서는 25년 전에 여성이 처음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으니 한국의 여성 후보 배출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여성지도자에 대한 한국민들의 인식과 신뢰는 계속해서 높아질 것으로 본다."

―여성 대통령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회의를 갖는 남성이 많다.

"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런 편견이 존재했다. 군대는 남성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핀란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지위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열정과 노력을 기울였다."

―여성 리더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는지.

"매우 자주(웃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이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같은 여성도 그런 고민을 털어놓더라. 그녀가 유엔대사직을 수행할 때 내가 외무장관이라 유엔에서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올브라이트는 '여성 대사'라는 호칭이 차별이라며 굉장히 싫어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취임 초반에 고생을 많이 했다. 똑똑한 남성 정치인들의 공격을 수없이 받았다. 어디에도 파라다이스는 없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여성 정치인들에 대해 언론이 붙여주는 칭호랄지 기사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고정관념일 뿐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여성 정치인으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나.

"2000년 스웨덴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이슈가 된 게 나의 핸드백이 (몸집에 비해) 크냐, 작으냐였다. 남성 지도자였다면 그런 뉴스가 나왔을까. 우리 재무장관도 금발의 멋진 여성인데, 그녀 또한 너무 큰 핸드백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정작 그녀는 유로존의 재정 위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도 핸드백의 크기가 문제였던 거다. 내가 작은 핸드백을 선물로 보내면서 '이제 더 이상 말들을 안 하겠지?' 하고 위로했다. 밖에서 하는 얘기들을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자기만 힘들다. 그래서 여성 정치인들은 강한 의지력을 가져야 하고 둘째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셋째가 유머감각이다. 매사를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배짱과 웃음으로 대범하게 넘길 줄 아는 용기!"

―핀란드 국회에는 국회여성네트워크(NWFP)라는 여성 정치인들의 모임이 있다고 들었다. 각료와 국회의원의 절반이 여성인 핀란드에 굳이 '여성'을 특화한 모임이 필요할까.

"여성의 1유로는 80센트(A woman's euro is 80 cents)라는 말이 핀란드에 있다. 여전히 여성은 남성 임금의 80%를 받기 때문이다. 또 핀란드의 많은 여성은 그들의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 남성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해야 한다. 양성평등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여성 네트워크가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여성들 안에서도 각기 다른 관점, 의견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보육시스템에 대한 전업주부와 직장 여성의 의견이 다른 것처럼. 최적의 정책을 만들어내는 데는 다양한 그룹의 여성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빵과 자유를 동시에 얻는 길

타르야 할로넨은 세계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났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칼리오라는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층이 모여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용접공,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할로넨은 "나의 어머니 릴리는 굉장히 쾌활하고 정직하며 강한 여성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치인으로서의 골격을 바닥부터 탄탄히 다진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할로넨의 원래 꿈은 예술가였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죠." 1968년 헬싱키 대학에서 형사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1970년 핀란드노동조합(Finnish Trade Union)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으로 6선(選) 국회의원, 법무장관, 외무장관을 거쳐 2000년 핀란드의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법을 전공한 이유가 부모님 때문이라던데.

"노동자 출신인 부모님은 맏딸인 내가 실용적인 분야로 진출하기를 바라셨다. 다행히 법학이 나에게 잘 맞았고 변호사 일도 보람 있었다. 때때로 내가 '인생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투덜대면 어머니는 '삶이란 원래 공평하지 않아. 그러니 네가 인생을 공평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 하지 않니?'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빵'이라고 가르치셨다.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란 자유냐, 빵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자유와 빵 모두를 쟁취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인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스웨덴계인 아버지가 핀란드에서는 소수자에 속했다. 사회 개방화가 진행되던 대학시절 집단의 가치 못지않게 개인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소수자의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할로넨은 1980년대 남성동성연애자협회 회장까지 맡은 바람에 동성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3년 "타르야는 레즈비언"이라는 발언이 남자 국회의원 입에서 나와 핀란드가 들썩거린 해프닝은 유명하다. 할로넨이 그 말을 뱉어낸 토니 홀메 의원이 정중히 사과할 때까지 '노코멘트'로 일관한 뚝심도 유명하다. 할로넨은 말했다. "널리 퍼져 있는 말, 우리가 진실로 믿고 있는 사실의 상당수는 편견인 경우가 많다. 동성애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며 성(性)소수자들도 삶의 질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2000년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싱글맘' '강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미혼모라는 편견을 어떻게 극복했나.

"우리 집안 여자들은 평범하면서도 강인하다. 또 핀란드에서는 많은 젊은이가 결혼 전 동거를 하기 때문에 싱글맘으로 사는 게 그리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남자친구와 헤어져 어린 딸을 혼자 키우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노조 변호사로 일하면서 모유 수유를 병행하니 강한 체력을 가진 나로서도 버거웠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의원 보좌관이었던 여섯 살 연하의 펜띠 아르야르비 박사와 대통령 공관에서 결혼했다.

"나의 딸 안나와 펜띠의 아들 에스코가 결혼식 증인으로 섰다. 이번 지방선거에 남편이 출마했다. 아내의 정치적 이력 때문에 아마도 그는 경쟁자들보다 훨씬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해야만 선출될 것이다(웃음)."

―한국 방문이 두 번째다.

"한국과 핀란드는 비슷한 면이 많다. 실리와 실용을 추구하는 국민성이 같고 역사도 비슷하다. 핀란드는 자유를 얻기 위해 스웨덴, 러시아와 700년 동안 싸웠다. 두 나라 모두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경우라 한국이라고 하면 먼 친척, 사촌 같은 연민이 생긴다."

―당신을 존경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한 말씀.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있고 때로 그 꿈은 깨지기도 한다. 하지만 꿈이 깨져도 삶은 지속된다. 꿈이 깨진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