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TALK] 낡은 것이 아름답다… 디자인, '폐허' 속으로

옷을 갈아입는 방은 버려진 커다란 주황색 물탱크에 구멍을 내서 만들었다. 가게 내부는 버려진 폐가구와 침대 매트리스·문짝·닳아빠진 벽돌로 장식됐다. 25일 서울 한남동에 문을 연 한 의류편집매장의 모습이다. 이 매장 디자인을 기획·지휘한 제일모직 정구호 전무는 "쉽게 말하면 우리 매장은 쓰레기 더미에서 나왔다"고 했다. "다들 쉽게 친환경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패션 매장을 짓고 허무는 과정에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외면한다. 매장의 모든 물건을 재활용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낡고 황폐한 것'이 요즘 건축·인테리어계의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이건축연구소' 이성란 소장은 "건축이나 인테리어가 단순히 보기에만 좋은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 작가가 많아졌다"고 했다. "새로 지어 번쩍번쩍한 건물은 오히려 촌스럽고, 옛것을 재활용해 낡고 거친 느낌이 드는 건물이 더 멋지다는 인식이 최근 들어 번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아트 기와'라는 디자인 자재 회사는 최근 허물어져 가는 고택(古宅)을 돌며 주운 망가진 기와를 세척하고 이어 붙인 것을 인테리어 자재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깨진 기와를 이어 붙여 벽면 재료로 활용하는 곳이 많아졌다. 폐허에서 건진 자재로 새 작품을 만드는 셈"이라고 했다.

업계 사람들은 중국 건축가 왕수(王樹)가 올해 2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Pritzker)상'을 받은 게 '폐허 디자인' 유행에 촉매가 됐다고 말한다. 그가 철거한 전통 가옥에서 나온 기와 200만장을 신축 대학 건물의 지붕을 덮는 데 사용하면서, 폐자재가 '친환경' '역사의 재해석' 등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성란 소장은 "몇년 전 설치미술가 최정화씨가 서울 아현동 재개발 공사장에서 주워 모은 711개의 형형색색 문짝으로 서울 명륜동 서울여자대학교 공사현장 가림막을 만들어 화제를 모았었다"며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인식은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