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늦가을에 보내는 편지
입력 : 2012.10.30 22:45
오늘처럼 안개 자욱한 날이면 저수지 위 나룻배 띄우던 아버지
억새 춤추면 한 지게 담뿍 담아 머루 고구마 자식들 안겨주던 당신
물에 잠긴 고향 못 떠나셨던 것… 속 깊은 당신 마음 위로 못한 후회
오늘처럼 안개 짙은 날이면 당신은 애첩의 아양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짙은 안개의 촉촉함에 홀렸는지, 자식처럼 여기던 누렁이조차 외면한 채 대문을 나서셨지요. 안개 자욱한 저수지 위에 나룻배를 띄우고, 그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외양간 누렁이는 남겨진 서러움에 하루 종일 구유에 가득한 여물조차 외면한 채 뒷발을 울리며 큰소리로 당신을 불러댔어요.
신혼 시절 돌아누울 때마다 이불자락의 버석거리는 소리도 많이 신경이 쓰이셨다죠. 첫딸이 태어나자 곧바로 뒷밭에 목화씨를 뿌리고, 밭두둑에 오동나무를 심으셨다지요. 목화송이처럼 따뜻한 잠자리를 평생 마련해 주신 당신. 당신 덕분에 복수초를 시작으로 노란 마타리 꽃이 여름내 피고 지는 들꽃 정원에서 우리는 즐겁게 뛰어놀 수 있었답니다. 으름 속살 내보이고 산초 열매 익어 가면 가을은 절정으로 내달렸죠.
당신은 억새가 춤추기 시작하면 바쁜 중에도 한 지게 담아오고, 청미래 넝쿨 걷어와 농막을 장식해 두어 어린 딸들이 꿈을 꾸게 해 주셨죠. 점심식사를 하시고 난 뒤 습관처럼 봉초를 꼭꼭 말아 입에 물고 까맣게 익은 까마중, 새콤달콤한 머루, 그리고 땅콩까지 캐서 농막에 넣어주셨지요. 풍요로운 가을 향기는 토광에 알곡과 함께 가득 채워지고, 사랑방 윗목에는 고구마 통가리가 한자리를 차지한 채 겨울을 기다렸지요. 생쥐처럼 드나들며 고구마를 씹는 자식들을 바라보시던 당신의 그 넉넉한 미소가 그립답니다.
지금 바라보이는 저 초평저수지는 만수(滿水)의 저수지가 아니라, 당신과의 추억이 만수만큼 가득한 유년의 저수지입니다. 당신이 평생 사랑하여 떠나지 못하셨던 그곳에서 오랜만에 당신을 그립니다. 햇살이 안개를 밀어내고 저수지 안으로 붉은 물감이 흘러내리던 가을, 고요한 저수지에 가을 산이 오롯이 담긴 모습은 감성까지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수지 아래 묻힌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저수지를 당신 저수지라 여기셨지요. 배를 타고 안갯속으로 사라지던 당신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운 가을날입니다.
얼마 전 그 저수지에서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가 나룻배에서 비발디 곡을 연주하였답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찰랑거리는 물결 위에서 춤을 추었어요. 모처럼 저수지도 호사를 했지 뭐예요. 아버지 당신도 들으셨나요? 멀리 깊게 퍼지며 가슴 저미게 했던 그 음률을. 물안개에 묻혀 연주를 듣는 내내 가슴이 아렸습니다. 황홀하게 피어나던 그 곡이 아버지의 고향이 수몰되어 평생 아픔으로 서성이던 저수지에 울려 퍼질 때 제 몸은 전율하였답니다.
그날 안개는 는개비처럼 내렸습니다. 고향 떠나기 싫은 당신의 마음인 양 그렇게 말입니다. 한 계절을 지켜낸 허수아비처럼 뒤란을 서성이며 접붙인 감나무를 끌어안고 참죽나무를 애잔하게 올려다보며 되뇌던 당신의 말씀을 듣고야 말았습니다.
"여럿이면 뭐하나? 댑싸리 가꾸고 마당 쓸 자식 하나 없는데…."
허허로운 허수아비가 된 자신을 낯설어하셨지요.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이 서럽고 낯선 곳에서 누군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괴로운 현실을 알고 계셨기에, 그저 고향에서 세월에 나룻배를 타고 가며 이 강물에 머물고 싶어 하셨지요.
당신은 가을 낭만을 아시는 분이었지요. 나룻배 타고 가다 백로가 한가로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뜸부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기도 하셨던 분이었지요. 고추잠자리 맴돌던 다랑이 논도 가을이면 계절만큼이나 풍요로웠어요.
잠결에 들은 비질소리에 눈 비비고 나오면 마당은 빗으로 빗은 머릿결처럼 한쪽으로 빗금 질을 해둔 것 같았지요. 늘 부지런하여 안개커튼이 걷히면 멍석에 매상할 나락을 내다 널어 놓으시던 당신. 짙은 안개 낀 날 오후는 유달리 더 청명하여 알곡 말리기엔 제격이었습니다. 뒷짐 진 당신을 흉내 내며 벼 멍석에 쓱쓱 소리 내며 고랑을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그 저녁은 풍구바람에 쭉정이 날려버려 알곡만 매상자루에 담아놓고, 바지에 붙은 터럭을 홀홀 털면서 하루를 마무리하셨죠. 그 자루 바느질을 눈여겨보고 흉내 내던 딸년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속 깊은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 후회가 안개 되어 젖어듭니다. 한숨처럼 달그림자에 길었던 아버지 당신의 그림자를 기억합니다. 마른기침을 하시면서도 풀물 든 손으로 참깨 봉지, 땅콩 봉지 아홉 개나 만들어 내어주시던 당신이 몹시도 그리운 가을입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