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민폐… 드라마에서 '아버지'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아버지가 '실종(失踪)'됐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버지 캐릭터들이 어떤 음모나 악인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돼 초반에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살아있다 하더라도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채 가족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무능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런 드라마가 최근 종영했거나 현재 방영 중인 것을 합해 7편이나 된다. 방송가에서는 "드라마에서 더 이상 '대발이 아버지'를 기대하긴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대발이 아버지'는 1992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집안의 엄격한 주인이자 기둥으로 나왔던 아버지 캐릭터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다섯손가락'에서 남자 주인공 아버지는 3회 만에 불타 죽었다. 아내(채시라)는 화재 현장에 남편이 쓰러져 있는데도 구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탈출하지 못하게 문까지 막고 혼자만 살아 나온다. MBC '메이퀸'에서도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선배(이덕화)에게 배신당해 첫회에서 살해당하고, KBS '착한남자'에서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9회 만에 사실상 아내(박시연)에 의해 죽는다.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KBS '내 딸 서영이'에서 이삼재(천호진)는 하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가정을 풍비박산 낸, 그래서 딸이 존재 자체를 숨기고 싶은 아버지로 나온다. 같은 드라마의 최민석(홍요섭)은 친구의 회사에서 '술 상무'를 하며 가정이나 회사에서 무기력하게 자리를 지킨다. MBC '아들녀석들'에도 왕년에 잘나가던 사업가였다가 크게 실패하고, 가족의 골칫거리가 된 가장 유원태(박인환)가 나온다. KBS 일일극 '별도 달도 따줄게'의 아버지 서만호(김영철)도 융통성 없고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긴 마찬가지다. 앞서 9월 종영한 '해운대 연인들'에선 뇌를 다쳐 지능이 저하된 아버지 고중식(임하룡)이 나왔다.

김원 문화평론가는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며 "드라마 속 아버지 부재(不在)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한 시대에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센 여성들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했다. '내 딸 서영이'의 유현기 PD는 "이 시대의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힘들어하고, 가정에서도 설 자리를 잃은 모습이 많은데 그 아픔을 이야기해보자는 캐릭터"라고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흔해진, 한창때 가정에 소홀했다가 명예퇴직을 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가정에 돌아온 남성들이 드라마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김승수 서울예대 교수는 "드라마 주 시청 층인 여성을 고려한 측면도 있고, 작가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도 한 원인"이라고 했다. "남성들이 약하게 그려지고, 상대적으로 여성이 강하게 그려지면서 여성들의 잠재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실종 사태'는 언제쯤이나 변화를 맞을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실제 우리 삶에서 퇴직 후 일자리가 늘어나고 남성들의 파워가 늘어나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현실에 맞게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대표적 가족드라마 작가인 김수현씨의 경우 아버지들을 1세대는 권위적으로, 2세대는 아내에게 잡혀 사는 초라한 모습으로, 3세대는 남녀를 구분하기보다 각자 가치관을 통해 관계를 만드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며 "현재 드라마에는 이 가운데 2세대 아버지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앞으로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