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연극은 어머니 젖가슴"이라던 무대의 큰 별

"손 감독, 책 가져왔어?" 병상에 누운 대(大)배우는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문병 갈 때면 '책'부터 찾았다. 연극 대본을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1947년 데뷔 이후 60년이 넘도록 연극 무대를 지켜온 그에게 대본이란 한시도 떼놓을 수 없는 벗이고, 책이었다.

그 책에 살을 붙이고 영혼을 입혀온 배우 장민호(88)씨가 2일 오전 1시 4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1945년 고향 황해도 신천에서 혈혈단신 월남해 1947년 조선배우학교를 졸업한 후 '파우스트' '성웅 이순신' 등 200여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별명은 '파우스트 장(張)'. '파우스트' 국내 초연(1966) 이후 수차례 주역을 맡을 때마다 관객을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2004)와 '천년학'(감독 임권택·2007)에도 출연한 그는 연극을 '어머니 젖가슴'으로 불렀다.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연기자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법"이라며 "TV나 영화에서 활동하더라도 연기의 뿌리인 무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내게 마음의 박수를 쳐본 적이 없다. 늘 아쉬움이 남는다"던 엄격한 배우였다.

그와 그의 60년 연극 동지(同志)인 배우 백성희(87)씨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 극장은 우리 연극사에서 배우 이름을 단 최초의 국공립 극장이다. 2010년 12월 서울역 옆 옛 기무사 수송대 자리에 극장이 문을 열 때 "배우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데, 이렇게 극장이 만들어져 이름과 정신이 남을 수 있으니 영광"이라고 말했다.

작년 3월 개관작 '3월의 눈'은 두 배우의 '연기하지 않는 연기'로 매회 매진 사례를 빚었다. 빗발치는 요청에 5월 재공연 무대가 올라갔고, 장씨는 36회 공연 중 24회를 소화하는 열정을 보였다. "3월에 내리는 눈처럼 금방 녹아 없어지는 게 인생이고, 연극도 커튼콜 박수 소리와 함께 소멸하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남는 건 '그 공연 괜찮더라'는 평뿐. 허무하기 짝이 없지만 얼마나 엄숙하고 솔직한 행위인가?"

1969~71년과 1980~90년 두 차례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2010년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을 때 원로 배우의 소감은 "죄스럽고 염치없다"였다. "스승 같고 아버지 같던 이해랑 선생님이 작고하시고 그분을 위해 한 게 없다"고 했다. "선생님 계신 동네(저승)에 가서 꾸지람이나 듣지 않을까 걱정"이라던 그가 이제 그 동네로 떠났다.

유족으로 부인 이영애씨와 아들 장우성, 딸 장수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장지는 성남 메모리얼파크다. 5일 오전 10시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 영결식을 갖는다. (02)301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