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문학산책] '베르테르의 슬픔' 아니라 '베르터의 고뇌'라고?

소설가 이호철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열네 살 때 광복을 맞았다. 일본어 교육을 받은 소년 이호철은 일본 신조사(新潮社)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을 샅샅이 읽었다. 그는 "19세기 프랑스와 러시아 소설에 흠뻑 빠져 지냈다"고 했다. 이호철은 6·25 때 인민군 소년병으로 징집돼 정규교육을 더 받지 못했지만, 혼자서 읽은 일본어 세계문학 전집을 문학의 자양분으로 삼아 창작 활동에 나섰다. 이처럼 광복을 앞뒤로 해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우리 문인들은 대부분 일본어 세계문학 전집을 기억 속에 갈무리해놓고 글을 써왔다.

1960년대엔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한글세대를 위해 을유문화사·정음사·신구문화사에서 세계문학 전집을 냈다. 1970년대부터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월부로 세계문학 전집을 갖추는 집이 늘어나자 여러 출판사에서 세계문학 전집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번역의 품질이었다. 대부분 일본어 중역본(重譯本)이었고, 다른 번역본을 베낀 번역본이 더 많았다. 2005년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영미문학작품 서른여섯 종의 번역본 570여권을 조사했더니 54%가 다른 번역을 표절한 것이었고 신뢰성이 높지 않은 번역이 24%,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번역이 10%나 됐다. 영문학자들이 추천할 만한 번역은 11%에 그쳤다.

그래도 한국문학은 우리말로 옮겨진 외국 문학을 자극제로 삼아 새로운 감성의 영역을 넓혀왔다. 창작의 세대교체 못지않게 외국 문학 번역에도 새 바람이 일어난 1990년대 들어 세계문학 전집도 세대교체기를 맞았다. 1998년 민음사가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돼야 한다"며 새로운 세계문학 전집을 내기 시작해 최근 300권을 돌파했다. 전집이라도 100권을 넘지 못했던 우리 출판 풍토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민음사는 또 우리 고전소설과 현대소설도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존중해 전집에 포함시켰다. 민음사가 좋은 반응을 얻자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열린책들·펭귄클래식코리아·을유문화사·시공사·책세상·푸른숲·창비 등 여러 출판사도 젊은 외국 문학 연구자들의 번역으로 세계문학 전집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 결과 번역의 품질도 좋아졌고, 독자들이 다양한 번역본을 놓고 고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오랜 관행처럼 굳어진 일부 오역(誤譯)을 바로잡은 번역본도 눈길을 끈다. 문학동네가 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지금까지 '돌고래'로 번역된 소설 속의 'dolphin'이 어부들 사이에선 '만새기'로 불리는 다른 물고기라고 바로잡았다. 낯익은 제목이 번역자의 해석에 따라 바뀐 경우도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최근 창비에서 낸 번역본에선 '젊은 베르터의 고뇌'로 바뀌었다. 주인공 이름 Werther를 '베르테르'로 읽는 것은 일본식 발음이고, 원작 제목에서 'Leiden'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뇌'로 옮기는 게 옳다는 얘기다.

카뮈의 '이방인(異邦人)'도 문학동네 번역본은 '이인'이라고 했다. 프랑스어 제목인 'L'etranger'는 영역본(英譯本)에서 'Outsider'로 번역됐고, 우리말 '이방인'도 어색한 번역이 아니다. 새 번역본 '이인'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번역자는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가 남들과 다른 인간, 즉 '이인(異人)'이고 뫼르소 내면에 또 다른 뫼르소가 있기에 두 사람, 즉 '이인(二人)'이란 뜻도 지닌다고 주장했다.

물론 새 번역본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공자들은 옛 번역이라고 해서 다 오역이 있거나 문체가 낡았다고 낙인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섣부른 새 번역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번역은 어차피 검증의 도마 위에 올라가면 이곳저곳에서 난타당하기 십상이다. 원문에 충실하지만 글이 너저분한 직역(直譯)은 '정숙한 추녀(醜女)'라 하고, 원문을 그대로 옮기진 않았지만 문체가 아름다운 의역(意譯)은 '정숙하지 못한 미녀'라 하지 않는가. 요즘엔 워낙 외국 문학 전공자들이 많기 때문에 서툰 번역은 인터넷에서 금방 난도질당한다. 외국 문학을 전공한 출판사 편집자들이 번역 원고를 서너 번씩 검토해 출간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선 대학에서 외국 문학 전공자들의 원전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외국 문학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가 번역 비평을 활발하게 해 독자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 외국어에 능통한 문인들이 짬짬이 번역에 손을 대는 것도 권장할 일이다.

겨울이 오고 있다. 추위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면 마음도 더 깊이 내려앉기 좋은 계절이다. 삭풍이 부는 바깥을 피해 안으로 문을 잠그고 세계문학 전집을 한 권씩 독파해가면서 영혼의 땔감을 쌓아뒀다가 때때로 불을 지피는 게 어떨까. 세계문학 전집을 한쪽씩 넘기다 보면 사박사박 눈길 밟는 소리가 각자의 내면 풍경 속에서 울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