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서 서울 마포까지… 버스 세 번 갈아타며 통학, 80세 할머니의 '수능 一念'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엄마도 대학 간다. 일성 파이팅!' '여보, 등록금 준비해.'

2013학년도 수능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인 8일 오전 8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금란고 정문 앞에 60대 주부 10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뒤늦게 공부하는 여성들을 위한 학력인정학교인 일성여고 학생이다. 이들이 이날 단체로 응원에 나선 이유는 올 수능 최고령 수험생인 일성여고 3학년 수험생 류옥이(80)씨가 이곳에서 시험을 보기 때문이다.

류씨가 나타나자 후배 주부들은 "선배님 파이팅" 하고 외쳤다. 류씨는 환하게 웃으며 "(후배들도) 열심히 하세요. 다들 끝까지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시험장으로 총총히 들어갔다.

실제 출생연도가 1932년생(호적상은 1934년생)인 류씨는 일제강점기 경남 사천에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일본인 교사들이 떠나면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 어쩔 수 없이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80년부터 24년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대학가에서 레코드점을 운영하던 류씨는 어느 순간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학생들이 외국 가수 이름이라도 물어보면 어떡하나 하고 항상 걱정했는데, 공부하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2004년 류씨는 레코드점 문을 닫고, 그동안 부러움과 한으로만 맺혀왔던 학업의 꿈을 다시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그해 학력인정 평생교육 시설인 양원초등학교에 들어가 2008년 졸업했고, 같은 해 일성여자중·고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류씨는 매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집에서 서울 마포구 학교까지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며 통학했다. 왕복 통학 시간은 4시간. 그러나 류씨는 올해 결석은 물론 지각 한 번 한 적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교내 백일장도 다른 학생들은 "나 글짓기 못한다"며 빠지기도 했지만, 류씨는 빠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요즘 고등학생들은 다들 하는 거예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등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류씨의 담임 길응경(45) 교사는 "3학년 중에서도 왕언니인 류씨가 열정을 보여주셔서 그런지 우리 반 출석률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8일 오후 6시, 땅거미가 깔리고 수능 마지막 5교시 제2외국어·한문 시험의 끝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여고생들과 함께 류씨가 걸어나왔다. 나이가 들면서 허리가 굽고 무기력증이 온 탓에 한발 한발 느린 걸음을 걷던 류씨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생에게 수능이란 두려우면서도 간절한 마지막 목적지죠. 힘들었지만 저는 끝까지 해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