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돈 꿔주러 삼만리… 콜롬비아 버스사업까지

지금 남미(南美)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선 한국형 버스 시스템을 옮겨 심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시민 1000만명이 이용하는 버스 1만2000대에, 교통카드로 요금을 자동 징수하고 다음 버스가 언제 정류장에 도착하는지 알려주는 지능형 교통 시스템을 2015년까지 구축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이 사업에 필요한 자금 3억달러 중 1억2000만달러(한화 1300억원)를 한국의 신한은행, 우리은행, 수출입은행이 대주고 있다. 보고타 시(市) 정부가 최저 수익을 보증하고 버스 이용객 숫자에 따라 추가 수익을 지급하는데 은행들이 예상하는 연 수익률은 5% 수준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일종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3개 은행이 공동 참여하기 때문에 위험을 분산시키면서 해외 PF 사업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출 막힌 은행, 해외 PF 발굴 나서

이익의 80% 이상을 국내 예대마진(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에 의존하며 편하게 장사해 온 은행들이 최근 해외 PF 사업 발굴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수익이 나오는 곳이면 지역과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산업은행은 지난 3월 러시아 루코일사의 우즈베키스탄 하우작·샤디·칸딤 가스전 개발 사업에 PF 방식으로 참여했다. 아시아개발은행, 이슬람개발은행, BNP파리바 등 해외 금융기관과 공동으로 3억7500만달러의 자금을 모아 개발 사업자에게 빌려주었다.

금융당국도 은행들의 해외 PF 진출을 적극 돕고 있다. 올 들어 6월까지 국내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 중동 지역에서 136억달러 규모의 플랜트 건설 사업을 따내자 당국과 시중은행들이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개발 자금을 조달해 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은행들이 해외 PF 사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한 시중은행 임원은 "예금은 자꾸 들어오는데 딱히 굴릴 데가 없으니 해외 PF를 바라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용 좋은 대기업들은 대출을 쓰지 않고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만 돈 꿔달라고 덤비는 상황이라 예금 들어오는 게 전혀 반갑지 않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은행의 예금 대비 대출 비율을 나타내는 예대율은 3년 전 112% 수준이던 것이 올 상반기에 96% 수준으로 떨어졌다. 100원의 예금을 받으면 그중 96원만 대출로 나가고 4원이 남는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놀고 있는 돈(idle money)'이 늘면서 예대마진도 줄었다. 작년 1분기에 3%포인트가 넘던 예대마진이 올 상반기엔 2.6%포인트가 됐다.

◇국가신용등급 올라가 유리한 환경

세계 3대 신용평가사가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잇달아 상향 조정하면서 국내 은행들의 해외 자금 조달 비용이 줄어든 점도 해외 PF 진출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농협은 지난 9월 5억달러 규모의 해외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170개 기관투자가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애초 180bp(100bp=1%)로 제시한 가산금리가 165bp까지 떨어졌다. 농협은 당초 계획보다 훨씬 싸게 조달한 자금을 사우디아라비아 담수(淡水) 발전소,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10월 기자간담회에서 "국가신용등급 상향 조정으로 어느 때보다 싼 값에 돈을 빌려 해외 PF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해외 PF 사업에 진출해 현재 5% 수준인 해외 매출 비율을 3년 안에 10%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아직 걸음마… 전문 인력 육성부터

그러나 국내 은행의 해외 PF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가장 활발하게 해외 PF에 나서고 있는 수출입은행의 지난해 해외 PF 대출·보증 규모가 33억달러 정도다. 같은 해 일본 미쓰비시도쿄UFJ 은행의 실적(93억달러)의 3분의 1 수준이다.

일본 은행들은 유럽계 은행들이 유로존 위기 탓에 글로벌 PF 시장에서 주춤한 틈을 타서 아시아 지역 PF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지난해엔 글로벌 PF 시장 점유율 10%를 돌파했다. 엔화 강세를 발판으로 삼고, 미국·유럽계 은행보다 높은 신용등급을 배경으로 해외 PF 전담 부서와 해외 인력을 확충하며 항공기 리스 같은 신사업에 적극 진출한 덕분이다. 이미진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영 환경 속에서 해외 PF 육성에 성공한 일본 은행에서 배울 점이 많다"면서 "우선 장기적인 안목에서 전문 인력 양성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