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화려한 外出

찌뿌드드한 심신을 겨우 일으켜 잠깐 걸어볼 생각으로 밖에 나갔던 게 몇 시간 전 일이다. 아파트 뒤쪽으로 흐르는 내(川)를 끼고 만든 공원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저만치 마주 보이는 길에서 한 여인이 나를 향해 손짓을 보내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니야…. 언니!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엉, 어… 언니….” 질주하듯 뛰어온 그 여인은 나를 무작정 언니라 부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옷을 부여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어떻게든 떼어내려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나에게 더 매달리며 우는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 노년에 가까운 인상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나를 그 자리에 꼼짝도 못 하게 세워 놓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옆을 지나가는 산책객들은 힐긋힐긋 궁금한 표정만 던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5분여가 흘렀을까. 조금 전 여인이 뛰어왔던 그 길로 또 다른 한 여자가 정신없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헉헉거리며 고꾸라질 듯이 뛰어온 여자는 잔소리를 해대며 나에게 착 달라붙어 있는 여인을 다짜고짜로 떼어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참 내…. 그새를 못 참고…. 자꾸 이러면 어떡해요. 네?” 그제야 엄마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듯한 표정의 여인이 내 옷에서 마지못해 손을 떼더니 슬그머니 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미운 아이 흘겨보듯 잠시 바라보던 여자는 털퍼덕 돌바닥에 주저앉아 남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어 뭐라 물어보기는 해야겠는데 오히려 여자는 내 존재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심한 얼굴이다. 이게 무슨 꼴이람. 기분 전환을 위해 나왔던 산책길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모습으로 멍하게 서 있는 사람에게는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어처구니없게도 두 여자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근처 벤치로 걸어가 앉는 것이었다.

마음이 썩 개운치는 않았지만 이왕 나온 길이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아 되돌아 걷고 있는데, 여태 그곳에 있었는지 아까 그 여자가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다른 쪽으로 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모른 체하며 그냥 그쪽으로 내처 걸었다.

“저기요, 아까는 죄송했어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씀도 못 드렸네요.” 내가 오기를 줄곧 기다렸던 것인지, 여자는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죄송했다는 말을 거듭 해대며 고개를 수그리던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뜻밖에도 눈물을 글썽였다. 또 무슨 낭패를 보는 것은 아닐까 싶어 얼른 다른 한 여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인은 빛깔 고운 양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어 든 채, 벤치 뒤 잔디밭에 주저앉아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스럽게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풀을 잡아 뜯는 일에 집중했다.

“저기 저 사람은 제 이모세요. 치매에 걸린 지 몇 년 되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몹쓸 병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여자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더니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단다. 세상에 나올 때도 순서대로 왔으니 세상을 떠나는 순서 역시 그대로 가는 것이 순리(順理)일 거라며 내내 힘들어하더니 그예 돌아가신 지 이제 꼭 한 달째라고 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을 돌보는 일은 주위에서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일이라서 이종사촌들도 어머니 모시는 일에서 하나둘 손을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없는 정신에도 당신의 언니가 세상을 뜬 것을 용케 알고 있었던 것인지 자꾸 언니가 보고 싶다고 식구들을 졸라대서 며칠 전 조카인 자기 집에 모셔왔다고 했다. 단둘뿐이었던 자매지간의 정이 워낙 두터웠던지라 여자도 돌아가신 어머니 대하듯 이모를 많이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데 단 사흘도 못 되었는데 너무 힘이 들어 고단해 죽을 지경이란다. 아무나 만나면 언니라고 부르며 붙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밖으로 모시고 나가기가 겁이 날 정도라고 했다.

조카는 이모가 평소 지녔던 성정 그대로 다른 큰 말썽 없이 얌전하게 정신을 놓은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지만 불쌍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여인은 지치지도 않는지 소풍 나온 어린애처럼 양산을 빙빙 돌리기도 하며 내가 앉아있는 벤치 주위를 해맑게 뛰어다니고 있다. 풍진 세상의 온갖 근심을 다 잊은 듯한 표정이 마냥 행복해 보인다.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의 순간들이 그녀에게는 다시는 누리지 못할 화려한 외출로 꼭 기억되어 주기를…. 아무쪼록 이 기억의 조각만큼은 산산이 흩어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