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5개 두고 R&D만 집중… 로레알·랑콤도 찾아와

지난 8일 성남시 분당구 판교이노밸리에 있는 화장품 회사 코스맥스. 주영란 책임연구원은 밀가루 반죽처럼 생긴 흑색 안료를 믹서기에 넣어 섞고 있었다. 옆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검은 원료가 담긴 500mL 비커 20개가 쭉 늘어서 있었다. 흑색안료는 여성 속눈썹을 길고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는 마스카라액. 조금씩 성분을 달리해 어떤 배합이 눈썹을 더 길어 보이게 하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코스맥스 연구소 한쪽 방에는 사람 키(170㎝)만 한 높이의 냉장고 50여 대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항온조(恒溫槽)였다. 50도부터 영하 20도까지 다양한 온도가 설정돼 있는 각각의 항온조에는 온갖 화장품 제품이 들어 있었다. 박명삼 메이크업 연구소장은 "우리 화장품은 전 세계에 팔리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원료가 불안정해지지 않도록 테스트를 하는 것"이라며 "더운 곳에 오래 뒀을 때 크림이 액체처럼 녹아버리거나 변색되는 일 등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화장품연구개발 전문회사인 코스맥스는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회사다. 자기 브랜드 없이 ODM방식으로 제품의 개발·생산만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생산한 화장품은 약 1억개. 국내 화장 인구를 2000만 명이라고 하면 1인당 적어도 5개의 코스맥스 제품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제품을 공급하는 곳은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더페이스샵·미샤 등 국내 125개 사. 슈에무라·메이블린·로레알·랑콤 등 해외 유명 화장품 회사도 주요 고객사다. 매출도 매년 크게 늘어 최근 5년간 연 2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76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2000억원 안팎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물론 국내 경제도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요즘, 이 회사가 꾸준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비밀은 연구소에 숨어 있었다. 이 회사는 기초·메이크업(색조)·한방 등 특화된 5개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연구 인원은 약 100여 명. 전체 정규직원의 25%가 연구원이다. 이경수 회장은 "매년 기술개발비로 매출의 3~4%를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스맥스 생산제품의 95%가 이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한 ODM제품이다. 덕분에 가격경쟁력과 기술경쟁력을 동시에 갖게 됐다. 대표적인 히트 제품은 젤 타입의 아이라이너. 코스맥스에서 생산한 이 제품은 유명 해외 화장품 브랜드로 전 세계에서 1600만 개가 팔렸다. 코스맥스는 2009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기반기술연구소를 새로 발족시켜 원료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활동을 강화하는 등 기술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고객회사와의 높은 신뢰도 이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는 주요 요인이다. 코스맥스는 20년간 동아제약·대웅제약·광고회사 오리콤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 이 회장이 1992년 세웠다. IMF 경제위기 때 남들처럼 어려움이 닥쳤다. 당시 상당수 국내 화장품 회사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이 회장은 고객회사와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한꺼번에 1만 개 이상은 주문을 받아야 수익이 나는데 당시에는 1000~2000개씩 주문을 받았어요. 고객사들이 자금에 대한 압박을 덜라는 취지였죠. 해외에서 수입하던 원료값이 크게 올랐지만 원료가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소량생산·적기생산을 절대원칙으로 했어요. 덕분에 우리 고객회사 중에는 망한 곳이 한곳도 없고, 지금까지 거래를 계속하고 있죠."

해외시장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효과를 내고 있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 화장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국가에 직접 진출해 현지 화장품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 코스맥스는 지난 2004년 중국 상하이에 현지 법인인 코스맥스 차이나를 설립해 연평균 50%의 성장을 기록하며 지난해 40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회장은 "코스맥스 상하이 공장은 설비투자 등을 통해 올해 1억 개의 화장품을 생산하고, 올해 말에는 광저우 코스맥스 공장을 완공해 연간 4000만 개를 더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과 생산에 자신이 붙으면 자신만의 브랜드로 화장품을 만들고 싶지 않을까. 이 대표는 "우리가 자체 브랜드를 갖게 되면 고객의 경쟁사가 되기 때문에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다"며 "우리는 연구개발과 생산전문 회사로 세계 일등이 되겠다"고 말했다.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개발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판매망을 갖춘 유통업체에 제품을 제공하는 생산방식. 판매업자가 건네준 설계도에 따라 단순히 생산만 하는 OEM방식과 달리 자체 개발해서 납품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