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36] 나만의 길을 걷는 데도 '스펙'은 필요해?

안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는 대학을 막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다. 지방 명문대를 다녔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꼭 이루고 싶은 꿈도 있다. 오랜 꿈인 언론인이 되기 위한 준비도 착실히 해 왔다. 그러나 유명 언론사의 진입 장벽은 높디높고 그녀는 번번이 고배를 마신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절망부터 배우는 모양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 시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겹쳐 떠오른다. 그녀가 울며 겨자 먹기로 취직한 곳은 굴지의 패션잡지사 '런웨이'다. 기자도 아니고 편집장 비서직이다. 평소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유행을 좇는 경박한 삶의 태도를 은근한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안드리아에게 그 일이 적성에 맞을 리 없다. 세련되고 차갑기 그지없는 패션계 사람들 사이에 낀 너무도 평범한 여자 안드리아는 엉뚱한 행성(行星)에 불시착한 한 마리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이다. 미국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인 미란다는 '악마'라는 별명처럼 독하고 철저한 일 중독자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여성이 대단한 선배의 그늘 아래서 어떻게 조금씩 변화해 가는지가 이런 이야기의 관전 포인트일 것이다. 일 년 만에 안드리아는 자신이 무시하던 패션업계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고 '악마' 미란다를 존경하게 된다. 이제 안드리아가 성공한 여성 선배를 롤 모델 삼아 패션계의 근사한 공주님으로 변신한다는 예상 답안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안드리아의 선택은 그 안전한 결말로부터 슬쩍 비켜간다. 그녀는 사표를 낸다. 무엇이 진짜 성공인지에 대하여, 세속적 평가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새로운 기준을 직접 만들겠다는 소박한 의지에 의해서다. 사회적으론 성공했을지 몰라도 가정과 개인의 행복은 뒷전에 놓았던 선배 언니 세대를 따르지 않겠다는 후배 세대 여성들의 일성(一聲)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는 '된장녀'의 환상을 부추기는 영화가 아니라 한 20대 여성의 꽤나 현실적인 성장담이자 자아 찾기 서사로 읽힌다. 물론 안드리아만큼 '스펙'이 받쳐줘야 그것도 가능하다는 게 이 영화가 끝내 감춰놓은 서글픈 진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