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지우고 아이들의 꿈만 담을래요"

7년 전의 일이지만, 김순규(46)씨는 막내아들이 코피를 쏟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당시 막내아들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2년의 투병 동안 모자(母子)는 함께 웃고 울었다. 순규씨의 아들 이정표군은 열세 살의 나이에 하늘로 갔다. 짧은 삶이었다. 정표군은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게 마지막 바람이었다고 한다. 난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메이크 어 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은 정표가 빼곡히 쓴 일기를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책이 나오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 밤, 아들은 힘없이 입술을 뗐다. "엄마, 엄마도 이제 40대인데 다른 친구 엄마들처럼 인생 좀 즐기고 살아. 나는 우리 엄마가 요리도 배우고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 좋겠어." 이게 유언이 됐다. 책은 정표군이 세상을 떠난 지 이틀 뒤에 나왔다. "선생님, 우리 정표 자리 그대로 비워두세요, 꼭 다시 학교에 보낼게요"라는 순규씨의 글로 시작하는 책 '정표 이야기'는 어린 아들 영전에서 처음 읽혔다.

순규씨는 아들의 당부대로 살았다. 요리를 배우고, 글쓰기·영상 등 각종 강좌를 찾아서 들었다. 특히 영상기술은 지역방송사에서 일 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렇게 5년이 흘렀고, 지난 9월 순규씨는 다시 메이크 어 위시 재단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아들 정표군처럼 아픈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정표와 똑같은 아이, 우리 같은 부모를 보면서 힘들지 않겠느냐"고 걱정했지만, 순규씨는 "아픈 아이들 부모 마음은 내가 더 잘 안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재단 관계자는 "혹시 정표 이야기를 꺼내면 마음 아파하실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순규씨가 먼저 '우리 아들 많이 떠올려달라'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순규씨는 난치병 어린이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남기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한 자원봉사자가 책 '정표이야기'가 나오는 과정과 정표의 투병 모습을 찍어주셨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그때 나도 아픈 아이의 가족들에게 저런 선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순규씨와 메이크 어 위시 재단 자원봉사자들이 전남 목포시 자연사박물관을 찾았다. "공룡을 보고 싶다"는 여덟 살 윤준수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백혈병을 앓는 준수군은 이날 자연사 박물관 곳곳을 뛰어다녔다. 준수군 꿈은 고생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순규씨도 자기 키만큼 높은 캠코더용 삼각대를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준수군이 신기한 듯 공룡모형을 만지는 모습, 발굴체험을 하는 모습, 함빡 웃는 모습이 순규씨의 캠코더에 잡혔다. 순규씨는 이날 찍은 영상을 편집해 준수군 가족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부모에게 '아픈 우리 아이들'은 최고 예쁜 자식이거든요. 아픈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날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저는 봉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느끼는 고마움을 조금씩 갚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