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 신세 휴대폰 자급제… 전용모델, 구형 3종뿐

정부가 휴대폰 요금을 낮추기 위해 '단말기 자급제(일명 블랙리스트)'를 도입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휴대폰 제조사들의 무관심과 유통망을 장악한 통신사들의 견제가 심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단말기 자급제는 소비자가 이동통신 대리점이 아니라, 대형마트나 온라인에서 휴대전화를 구입해 자유롭게 통신사와 요금제를 골라 가입하는 제도다.

◇유명무실해진 단말기 자급제

현재 삼성전자·LG전자 등 각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내놓은 자급제 전용 단말기는 3종뿐이다. 한 해에 100여종이 넘는 신제품이 쏟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빈약한 라인업이다.

성능도 떨어진다. LTE(4세대 이동통신)에는 가입할 수 없는 3G(3세대 이동통신)폰인 데다, 카메라 화소(300만~500만)도 최신 단말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통신사의 비싼 요금제와 약정기간에 얽매이지 않고 휴대폰을 공급하겠다는 정부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소비자 선택의 폭이 좁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급제 단말기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통신사 대리점을 거치지 않은 휴대폰 이용자는 9월 현재 8만6000명. 전체 휴대폰 가입자(5300만명)의 0.16%에 불과하다.

자급제 단말기를 구하는 것도 힘들다. 제품을 살 수 있는 삼성·LG전자 대리점은 전국에 870여곳. 통신 3사가 보유한 전국 유통망 4만3000여곳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통신사들이 강력한 유통망으로 견제

제조사들이 자급제 단말기 보급에 소극적인 것은 이미 통신사와 강력한 유통구조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 제조사 관계자는 "소매상 역할을 하는 통신사에 기기를 넘기면 알아서 보조금과 약정기간을 매겨서 싸게 팔아주는데, 굳이 잘 팔리지도 않는 저가의 공기계를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통신사들이 앞다퉈 보조금 경쟁을 벌여 '17만원 갤럭시S3' '1만원 옵티머스 LTE2'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누가 30만~40만원을 주고 저가폰을 사겠느냐는 것이다. 제조사 입장에선 30만~40만원에 불과한 자급제 단말기보다 10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高價)폰을 파는 게 수익성이 더 높다.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사들도 자급제 단말기는 보조금을 주지 않는 등 외면하고 있다. 비싼 요금제나 약정기간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통신요금이 저렴한 '알뜰폰' 시장 활성화도 지연되고 있다. 알뜰폰 사업자들은 자체 통신망 없이 대형 통신사의 통신망을 빌려서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통신요금이 대형 통신사에 비해 20% 이상 저렴하다. 최근 알뜰폰 가입자가 100만명을 넘어서는 등 지속적으로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최신 스마트폰을 찾아보기 힘들고, 보조금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자급제 단말기와 알뜰폰 시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먼저 제조사와 통신사의 유통 유착구조가 깨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방통위는 이를 위해 최근 휴대전화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했다. 방통위 관계자는 "제조사와 통신사가 값비싼 제품만 내놓는 행태가 지속되면 결국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ZTE 등 외국 제조사들이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을 파고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단말기 자급제(일명 Black list)

소비자가 대형마트·온라인 등에서 싼 휴대폰을 사서 원하는 통신사와 요금제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제도. 분실·도난 휴대폰(블랙리스트 제품)이 아니면 통신사가 의무적으로 개통해줘야 한다. 통신사 대리점 위주의 폐쇄적인 유통 구조를 바꾸고자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