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뿌리이자 부패의 근원… 물의 격렬한 경고
입력 : 2012.11.17 03:14
물의 기원·구조부터 바다·문명의 등장 등 신화·과학·역사 속 '물의 傳記' 엮어내
H₂O: 지구를 색칠하는 투명한 액체
필립 볼 지음｜강윤재 옮김｜살림｜488쪽｜2만원
냉동 밥을 꺼내놓으면 랩에 방울이 맺힌다.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면 안경 안쪽이 뿌옇게 된다. 30분 이상 운동을 할 때, 아파서 흐느낄 때, 삐끗한 발목을 찜질할 때, 달아오른 냄비 뚜껑이 덜그럭거릴 때, 유리창에 입김을 불 때, 그리고 기상청 태풍 사진에서도 우리는 이것의 여러 형태를 본다. H₂O, 우리 몸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물이다.
과학 전문지 '네이처'의 편집고문이자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인 작업에 도전한다. '물의 전기(傳記)'를 쓰는 일이다. 우주가 어떻게 물을 조리했는지 보려면 항아리에 들어간 재료부터 알아야 한다. 물을 잘게 썰면 마지막에 H₂O라는 분자가 남는다. 저자는 수소(H)와 산소(O)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태초에 물이 있었다?
'땅의 씨앗(세상)'을 건져 올리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신(神)의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북아메리카, 인도, 러시아의 신화에서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땅이 먼저 나오고 홍수로 바다가 생겨났다는 창조 신화는 없다. 여기엔 심리적인 까닭이 있다. 고대인들에게 땅은 파악 가능한 것이지만 바다는 신비하고 원시적이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의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빅뱅 초기에 우주 전체 질량의 4분의 3은 수소, 나머지는 대부분 헬륨이었다. 헬륨은 불활성의 고독한 원소다. 그래서 수소는 우주에서 셋째로 많은 산소를 짝으로 맞이해야 했다. 형성기의 지구는 하늘만 증기로 가득 차 있을 뿐, 바다는 수백만 년이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가 냉각되자 그 구성요소들이 굳은 우유처럼 분리됐는데, 철은 가라앉아 핵이 되었고, 규소·알루미늄·칼슘·나트륨·산소 등 가벼운 원소들은 일부 남은 철과 함께 지각을 만들었다. 너무 가벼워 중력으로 붙잡아둘 수 없는 수소는 점차 우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 4000만 년 전쯤 물이 응축될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고 최초의 비가 내렸다. 생명을 잉태할 무대(바다)가 마련된 것이다.
필립 볼 지음｜강윤재 옮김｜살림｜488쪽｜2만원
냉동 밥을 꺼내놓으면 랩에 방울이 맺힌다.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면 안경 안쪽이 뿌옇게 된다. 30분 이상 운동을 할 때, 아파서 흐느낄 때, 삐끗한 발목을 찜질할 때, 달아오른 냄비 뚜껑이 덜그럭거릴 때, 유리창에 입김을 불 때, 그리고 기상청 태풍 사진에서도 우리는 이것의 여러 형태를 본다. H₂O, 우리 몸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물이다.
과학 전문지 '네이처'의 편집고문이자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인 작업에 도전한다. '물의 전기(傳記)'를 쓰는 일이다. 우주가 어떻게 물을 조리했는지 보려면 항아리에 들어간 재료부터 알아야 한다. 물을 잘게 썰면 마지막에 H₂O라는 분자가 남는다. 저자는 수소(H)와 산소(O)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태초에 물이 있었다?
'땅의 씨앗(세상)'을 건져 올리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신(神)의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북아메리카, 인도, 러시아의 신화에서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땅이 먼저 나오고 홍수로 바다가 생겨났다는 창조 신화는 없다. 여기엔 심리적인 까닭이 있다. 고대인들에게 땅은 파악 가능한 것이지만 바다는 신비하고 원시적이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의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빅뱅 초기에 우주 전체 질량의 4분의 3은 수소, 나머지는 대부분 헬륨이었다. 헬륨은 불활성의 고독한 원소다. 그래서 수소는 우주에서 셋째로 많은 산소를 짝으로 맞이해야 했다. 형성기의 지구는 하늘만 증기로 가득 차 있을 뿐, 바다는 수백만 년이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가 냉각되자 그 구성요소들이 굳은 우유처럼 분리됐는데, 철은 가라앉아 핵이 되었고, 규소·알루미늄·칼슘·나트륨·산소 등 가벼운 원소들은 일부 남은 철과 함께 지각을 만들었다. 너무 가벼워 중력으로 붙잡아둘 수 없는 수소는 점차 우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 4000만 년 전쯤 물이 응축될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고 최초의 비가 내렸다. 생명을 잉태할 무대(바다)가 마련된 것이다.
◇"물은 괴짜다"
반복되는 해빙과 결빙은 단단한 바위를 쪼갰고, 빙하가 지구를 핥아 넓은 계곡이 생겼다. 지금도 강물은 흐르고 대양은 우아하게 선회하며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진다. 세계가 물에 의해 순환한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담수는 문명을 부양하고 지속시킨 뿌리였다. 페르시아어 사전에 나오는 첫 단어 'ab'는 '물'을 뜻한다.
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드라마틱하게 변해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얼 때 흙의 한 종류가 되고 증발할 때 공기의 한 종류가 된다"고 믿었다. 물의 존재와 물의 작용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오해는 18세기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산소와 수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뿌리 깊은 연금술적 물질관을 뒷받침했다. 고대 중국에는 흙·금속·나무·물·불 등 5원소설이 있었는데,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며 물을 창조 물질로 칭송했다.
저자는 "물은 괴짜"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액체와 달리 물은 얼 때 팽창해 밀도가 작아진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이타닉은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이 물에 뜨지 않아 빙산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밀도는 섭씨 4도에서 가장 크다. 물이 밑에서부터 위로 언다면 강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없을뿐더러 심해수의 순환을 막아 극지방은 훨씬 더 추위에 떨어야 할 것이다.
반복되는 해빙과 결빙은 단단한 바위를 쪼갰고, 빙하가 지구를 핥아 넓은 계곡이 생겼다. 지금도 강물은 흐르고 대양은 우아하게 선회하며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진다. 세계가 물에 의해 순환한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담수는 문명을 부양하고 지속시킨 뿌리였다. 페르시아어 사전에 나오는 첫 단어 'ab'는 '물'을 뜻한다.
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드라마틱하게 변해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얼 때 흙의 한 종류가 되고 증발할 때 공기의 한 종류가 된다"고 믿었다. 물의 존재와 물의 작용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오해는 18세기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산소와 수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뿌리 깊은 연금술적 물질관을 뒷받침했다. 고대 중국에는 흙·금속·나무·물·불 등 5원소설이 있었는데,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며 물을 창조 물질로 칭송했다.
저자는 "물은 괴짜"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액체와 달리 물은 얼 때 팽창해 밀도가 작아진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이타닉은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이 물에 뜨지 않아 빙산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밀도는 섭씨 4도에서 가장 크다. 물이 밑에서부터 위로 언다면 강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없을뿐더러 심해수의 순환을 막아 극지방은 훨씬 더 추위에 떨어야 할 것이다.
◇물이 지금 보내오는 신호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 만드는 작업의 시작은 40일간 육신의 물을 빼는 것이었다. 물은 생명의 뿌리이면서 부패의 근원이다. 미래에는 냉동과 해동의 방식으로 영생(永生)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액체 질소 속에서 세포는 회복 불능의 손상을 입기 때문에 아주 가냘픈 희망이다. 하지만 '자연의 부동액'은 경이롭다. 추위가 찾아오면 개구리는 항(抗)냉동 포도당을 생산하고 세포액이 끈적끈적해진다. 이렇게 고체로 굳으면 심장이 멈추고 가사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남극의 고대 빙상에서 얼음을 원통형으로 파내 성분을 분석하면 변화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20세기에 지구의 평균 해수면은 10~25㎝ 높아졌는데, 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상승량과 맞먹는다. 이 책은 지구 밖에서 물을 찾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 탐사 계획, 물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 H₂O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저자는 "물에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인간은 그 채무를 모른다"고 썼다. 그 물이 지금 격렬해지고 있다. 홍수와 가뭄 등 최근의 기상이변은 위험 신호라는 것이다. 대중의 눈높이를 겨냥한 책이지만 과학과 용어의 장애물에 막혀 중간 중간 심호흡을 하게 된다. 번역과 교열을 서둘렀는지 실수가 여럿 눈에 띈다. 그래도 신화와 역사, 철학과 과학으로 촘촘하게 쓴 물의 전기라는 점에서 반갑다. 원제 'A Biography of Water'.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 만드는 작업의 시작은 40일간 육신의 물을 빼는 것이었다. 물은 생명의 뿌리이면서 부패의 근원이다. 미래에는 냉동과 해동의 방식으로 영생(永生)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액체 질소 속에서 세포는 회복 불능의 손상을 입기 때문에 아주 가냘픈 희망이다. 하지만 '자연의 부동액'은 경이롭다. 추위가 찾아오면 개구리는 항(抗)냉동 포도당을 생산하고 세포액이 끈적끈적해진다. 이렇게 고체로 굳으면 심장이 멈추고 가사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남극의 고대 빙상에서 얼음을 원통형으로 파내 성분을 분석하면 변화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20세기에 지구의 평균 해수면은 10~25㎝ 높아졌는데, 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상승량과 맞먹는다. 이 책은 지구 밖에서 물을 찾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 탐사 계획, 물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 H₂O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저자는 "물에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인간은 그 채무를 모른다"고 썼다. 그 물이 지금 격렬해지고 있다. 홍수와 가뭄 등 최근의 기상이변은 위험 신호라는 것이다. 대중의 눈높이를 겨냥한 책이지만 과학과 용어의 장애물에 막혀 중간 중간 심호흡을 하게 된다. 번역과 교열을 서둘렀는지 실수가 여럿 눈에 띈다. 그래도 신화와 역사, 철학과 과학으로 촘촘하게 쓴 물의 전기라는 점에서 반갑다. 원제 'A Biography of W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