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쏟아낸 화가의 자만 혹은 고백

화가의 얼굴, 자화상
로라 커밍 지음｜김진실 옮김｜아트북스｜452쪽｜3만5000원

여기 긴 제목의 그림이 있다. '참사회원 헤오르흐 판 데르 파엘레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 예수'.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왼편엔 성 도나티엔, 오른쪽엔 무릎 꿇은 판 데르 파엘레와 청동갑옷을 입은 성 조지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플랑드르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가인 얀 반에이크(1390년경~1441). 작가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청동갑옷의 표면을 자세히 볼 일이다.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비친다. 반에이크는 '아르놀피니 초상'에서도 중앙의 작은 거울 속에 자신을 살짝 끼워넣었다.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리는가. 초상화나 풍경화, 정물화를 그릴 때는 목적이 분명하다. 화가로서 명예, 주문, 판매 등이 이유다. 그러나 팔 수도 없고, 누가 주문하지 않아도 화가들은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다. 영국의 미술평론가인 저자 로라 커밍은 "자기 표현 욕구" 때문으로 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현시욕(顯示欲).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일기를 쓰고, 셀카를 찍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자는 반에이크에서 뒤러·렘브란트·벨라스케스·뭉크·워홀·신디 셔먼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를 수놓은 대가들의 자화상과 작품 149점을 재료로 맛깔스러운 밥상을 차렸다. '비밀' '눈' '모티프' '무대 뒤편' '거울' '연행' '외로운 영혼들' '자기애' '피해자' 등이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 속사정을 풀어내는 키워드다.

◇失明할 뻔한 뒤러 자화상

반에이크가 수줍게 자신을 표현했다면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자존감'의 화신이다. 1500년에 그린 자화상은 비범한 헤어스타일과 눈빛으로 예수를 연상케 해 두고두고 논란이 된 작품. 인생의 정점, 고향 독일뿐 아니라 르네상스가 무르익은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인정받은 그의 자부심은 선배화가들과는 달리 그림에 자신의 이름(A.D.)을 당당히 적어 넣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자부심이 오만함으로 비쳤기 때문일까. 이 그림은 1905년 누군가 작은 핀으로 양눈을 찔러 흠집을 내는 수난을 당했다.

◇죽음·실연의 순간에도 그린다

바짝 깃을 세운 외투 가슴팍엔 유대인의 표식인 노란별이 그려져 있다. 하늘엔 먹구름 가득하고 뒤의 벽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숨을 거둔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1904~ 1944). 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1943년 이 그림 '유대인 신분증을 쥔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희생됐지만 이 그림 한 점은 역사를 웅변하는 증거로 남았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1577~1621)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는 성경의 한 일화를 그린 그림. 그러나 그림 속엔 화가의 실연담(失戀談)이 숨어 있다. 사랑했던 여인에게 버림받은 알로리는 여인의 얼굴을 유디트로, 둘 사이를 훼방놓은 여인의 어머니는 유디트 뒤의 몸종으로, 그리고 자신은 목 잘린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1863~1944) 역시 원치 않았던 결혼 문제로 여인과 크게 다툰 후 화염에 휩싸여 얼굴 형태를 잘 알아보기 힘든 모습의 '지옥에서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화가다"

로라 커밍이 자화상으로 특히 주목한 화가는 뒤러·렘브란트·벨라스케스 그리고 사실주의 대가 쿠르베와 반 고흐다. 평생 8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긴 렘브란트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에서 늙고 병들고 파산한 후의 모습까지 그림으로 자서전을 남겼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잡아내려 했던 렘브란트다운 작업들이다.

스스로 "나는 위대한 신처럼 그린다"고 외쳤던 쿠르베는 자기애의 화신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의 자화상은 모든 규범을 때려 부술 듯한 프랑스대혁명의 여운을 보여주며 대작 '화가의 작업실'은 완전히 자기에 심취한 화가의 모습을 기념비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고흐에 대해 "추호의 자기 연민을 섞지 않고 자신을 그렸다"고 평가한다. 모델을 구할 돈도 없었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릴 때는 해바라기처럼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릴 때는 별이 빛나는 모습처럼 그때그때 화풍에 충실하게 자화상을 그렸다.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쉬운 서술로 600년 서양미술사를 풀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덕택에 단순히 미술책이 아니라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처하는 화가들의 인생 드라마로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