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파워 클래식] 선택할 수 있어 괴롭다… 우리는 모두 비극의 주인공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기상 알람에서 시작된 갈등은 점심 메뉴의 선택과 저녁 퇴근길의 선택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삶은 이 무해하고도 무의미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간혹 이 일상다반의 행위가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끌 때가 있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신민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병헌이 보스에게 숨기기로 마음먹을 때, 소설 '감자'에서 복녀가 감자 몇 알을 훔쳤을 때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선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반전을 초래하는 선택 말이다.

가장 뼈아픈 후회는 그것이 선택의 결과일 때 비롯된다. 그리고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지나온 일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주나 별점과 같은 운명론들도 돌이켜보면 우리가 선택해온 길들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기 위한 주해라고 말할 수 있다. 간혹 우리는 선택의 연쇄가 가져온 결과에 망연자실해 질 때가 있다. 차라리 운명이나 세상 탓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실패를 최소화하고 싶을 때 우리는 처세술을 읽는다. '사기'나 '삼국지'를 통해 우리는 아직 뭔가 배울 게 남아 있는 사회 초년병을 자임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사기'나 '삼국지'를 이해한다면 이미 꽤 많은 과오를 저질러 버린 나이에 가깝다. 실패를 경험했기에 실패의 교훈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실수들을 우아한 비극으로 받아들일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윤리적으로 고결하고 우리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인물들도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결함 덩어리들이야 오죽할까!

2011년은 내게 불만의 한 해였다. 불행과 실수를 불만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납득할 이유의 부재 탓이 크다. 제법 여러 번 읽었지만 2011년 '시학'이 새롭게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때 '시학'은 일종의 자기 분석의 토대로 다가왔다. '시학'은 삶의 아이러니 깊은 곳에 선택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지금 내 불만은 아주 오래전 이미 선택했던 어떤 다짐과 연루되어 있던 것이다.

아동기에 읽었던 동화가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의 당의정을 선사했다면 '시학'은 삶을 좀 알게 된 어른들에게 쓰지만 필요한 위안을 준다. 우리는 무엇이든 생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고귀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선택한 고귀한 행동이 불행을 초래하는 것을 보며 사필귀정이 달콤한 거짓이 된 오늘을 목격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거듭 읽으며 이야기의 근본과 시대적 징후를 읽어내는 이유이다.

한마디로 '시학'은 비극 예찬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극은 진지한 드라마이다. 세속 비극이 눈물을 자극한다면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이끌어낸다. 연민과 공포는 나 역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깊은 공감이다. 그래서 모든 훌륭한 이야기는 한편으로 모두 다 비극이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영화의 인물들도 늘 선택을 한다. 벨 아미는 신분 상승을 위해 거듭 다른 여자를 선택하고, 마담 보봐리는 연애를 위해 빚을 지며, 안나 카레리나는 사랑을 위해 불륜에 뛰어든다.

사실 '시학'은 불완전한 이론서이다. 그래서 '시학'은 어렵다. 서사학자 츠베탕 토도로프가 인용하듯 시학은 도식적이고 개략적이며 비일관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학'은 누구나 읽어도 되는 책이기도 하다. 시학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원본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문학관을 갖고자 하는 독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시학'은 창조적 독법을 허락한다. 선택이 운명의 행로를 바꾸었다고 믿는 독자들에게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는 면죄부도 준다.

서른다섯, 이혼녀가 돼 돌아온 '건축학개론'의 서연이 자신의 옛집을 증축해야만 하듯이 어느 순간 시간은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서른다섯 무렵을 넘기게 되면 선택할 일은 줄고 선택의 결과만을 성적표처럼 줄기차게 받게 된다. 뒤늦게 찾아오는 위반 통지서처럼 결국 실수는 나의 것이다. 그 당혹스러운 나이에 '시학'은 인생의 개연성과 운명의 플롯을 보여준다. 그러니, 자기 삶을 인과론에 따라 재구성하고 싶을 때 '시학'은 훌륭한 인생의 조언이다.

[140자 트윗독후감]

"파워클래식 때문에 처음 접해본 '시학'은 전공과 무관한 책인데도 강한 흥미를 느꼈다. 2000년도 훨씬 전에 지어진 이 책이 현대의 문학작품과 드라마, 연극, 영화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 없고 완성도 낮은 요즘의 소위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을 강하게 추천해주고 싶다." (페이스북 응모자 Aum Kyu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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